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탄하오밍 (문단 편집) == 생애 == 1871년 광서성 용주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는 농사를 짓다가 조선업, 산림업 등의 막노동에 종사하였는데 1894년 군에 입대하여 [[좡족]]으로 역시나 좡족인 [[루룽팅]]과 의형제를 맺었으며 그의 휘하에서 관대, 통령, 부장을 거쳤다. 1911년 7월, 광서순방영 통령에 임명되었으며 [[무창봉기]]가 발생하자 [[신해혁명]]에 호응하여 11월에 루룽팅과 함께 독립을 선포하고 청조에 대항하였다. 이후 용주진수사를 거쳐 1913년 4월 광서육군 제2사단장에 임명되었고 육군중장으로 승진했다. 1914년 5월 용주진수사에 임명되었으며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하자 이를 부추기고 1등 남작에 봉해졌다. 처음에는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으나 1916년 3월, 위안스카이와 관계가 결렬된 루룽팅이 호국군에 가담하기로 결정하면서 광서육군 3군 군장, 호국군 제5군 총사령으로 [[호국전쟁]]에 참여했다. 이후 광동독군에 임명된 루룽팅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3월에 광동독군 대리, 4월에 광서독군 대리가 되었으며 이후 루룽팅이 양광순열사로 승진되면서 1917년 4월 10일에 광서독군에 정식으로 임명되었다. [[부원지쟁]]의 결과로 국무총리 [[돤치루이]]가 경질되고 [[리징시]]가 새로 임명되자 [[천빙쿤]]과 함께 리징시를 국무총리로 인정할 수 없다고 통전하였고 [[장훈복벽]]이 일어나자 [[선통제]]로부터 광서순무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루룽팅을 토역군 양광총사령으로 추대하여 [[장쉰]]에 대항하였다. 이후 복벽을 진압한 돤치루이가 구 국회와 약법을 복구하길 거부하자 [[쑨원]]이 광저우로 남하하여 군정부를 조직하였는데 광동성장 주경란 등과 함께 그를 환영했다. [[호법전쟁]]이 발발하자 월계상연군총사령에 임명되어 호남성으로 진주하여 [[청첸]], [[자오헝티]] 등과 함께 [[안휘군벌]] [[푸량쭤]]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나 루룽팅으로부터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으니 더 이상 싸우지 말라는 지령이 떨어지자 [[펑궈장]]의 정전령에 호응하여 진격을 멈추었다. 하지만 [[상계군벌]]의 장령들이 북양군벌의 최후의 근거지인 악양을 공격할 것을 독촉하자 결국 1918년 1월에 북벌을 재개했고 이 때문에 정전이 깨지고 호법전쟁이 재발하였다. 이때 호남독군에 추대되었으나 취임을 거부하고 호남군민양정으로 호남성을 사실상 지배했다. 이후 [[우페이푸]]의 공격으로 호남성에서 축출되었다. 1918년 [[쑨원]]이 광동에서 사실상 축출된 이후 루룽팅과 양광에서 떵떵거렸으며 1919년 1월, 광서육군무비당 교장, 광서 보진회(業保進會) 회장 등을 역임하고 1920년 12월 북양정부로부터 광서독군에 재임명되는 등 잘 나갔으나 1921년 6월, [[쑨원]]이 [[쉬충즈]]를 이끌고 루룽팅 토벌을 선언하면서 패배하여 광서성까지 쫓겨들어갔으나 1922년 6월, 광서성으로 진공한 [[천중밍]]의 군대를 몰아냈으며 8월에 북경정부부터 호위장군에 봉해졌다. 10월, 용주로 돌아왔으며 1923년 11월, 루룽팅이 광서 전성선후총판에 임명되면서 용주의 방위를 담당하였다. 하지만 1924년, [[심홍영]]과 [[리쭝런]]의 공격으로 루룽팅이 끝내 몰락하자 그를 따라 호남을 거쳐 상하이로 도주했다. 1925년 4월 17일, 그에게 앙심을 품은 부관에게 암살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