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탈냉전 (문단 편집) === 냉전 종식 (1985~1991) === || [[파일:COLD_WAR_END.jpg|width=100%]] || || 1990년, [[맥도날드]]가 [[모스크바]]에 들어서다.[* 냉전의 종결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장면으로, 이 맥도날드 소련 1호점은 모스크바 푸시킨스카야에 위치했었다. 서방 국가들에서는 소련 체제의 억압성이 많이 알려졌기에 당연히 충격을 받았고, 그런 공산주의 체제에 익숙한 소련 인민들에게도 서방보다야 덜하지만 꽤나 새롭게 다가왔던 사건이다.] || 소련의 끝물이던 1990년, 소련 최초의 맥도날드에서 자본주의의 맛을 맛보기 위해 수많은 시민들이 밤낮을 줄을 서 가며 햄버거를 주문했다. 안그래도 당시 민족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이 끓어넘쳤던 동구권에서, 자본주의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프랜차이즈가 '''모스크바라는 공산주의의 심장 한가운데'''에 들어섰다는 것은 곧 '''소련 체제의 몰락'''을 의미하였고, 개방과 개혁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나타냈으며, 이 교훈을 많은 공산국가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해당 지점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발하여 벌어진 [[2022년 대러시아 경제제재]]의 일환으로 [[맥도날드]]가 아예 러시아에서 철수하면서 2022년 3월 8일 폐점되었다.[[https://m.yna.co.kr/view/AKR20220309003052111?section=international/all|#]]] 공산권 붕괴 시작의 주인공은 [[레흐 바웬사|바웬사]]나 [[바츨라프 하벨|하벨]]이 아닌 [[미하일 고르바초프]]다. [[고르바초프]]는 막장으로 치닫는 [[소련]] 경제를 개선하고자 1987년부터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페레스트로이카 또는 글라스노스트]]를 추진, 코시긴 개혁의 실패와 전 년도의 [[체르노빌 사고]]에서 보여진 기존 관료제의 엄청난 경직성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미국]]의 지원을 얻고자 평화 외교ㆍ[[군축]] 협상을 실시해 서구권에서 엄청난 외교적 인기를 구가한것은 덤이었으며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였다. 그러나 개혁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문서를 참조해보면 알겠지만, 조급한 개혁으로 인하여 기존 소련의 유통구조는 도저히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지기 시작했으며, 암시장에서는 기존에 단돈 몇루블이면 구할수있던 물품들이 몇십배는 더한 가격에 거래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기존의 저렴하게 물건을 살수 있었던 국영상점에는 보급되어야 할 물건들이 전부 수익이 더 높았던 암시장으로 빼돌려지면서, 우리가 흔히 아는 소련 붕괴 직전의 그 시궁창스러운 경제 상황이 연출된다. 애당초 '''이 모든게 불과 2년만에 벌어진 일들이라는 것이다.''' 동구권에서도 소련이 약해진 이 틈을 놓칠 리가 없었다. 1989년, 동독 정부는 서독과 흡수통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베를린 장벽|어느 한 이탈리아 기자의 오보로 인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사실 단순히 이탈리아 기자의 오보 때문에 발생한 사태는 아니고 여러가지 일이 겹치면서 발생했다.], 모스크바가 이곳에 개입할 능력이 없는것으로 밝혀지자 이곳에서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의 모든 붕괴가 시작되었다. 폴란드, 체코를 시작으로 각지에서 공산 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유고슬라비아]]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당대 유고를 이끌던 티토도 죽었겠다, 공산주의 역시 약빨이 다 떨어졌다는것을 깨달은 정치인과 국민들은 이제 다시금 동유럽에서 부흥하는 [[민족주의]]와 [[탈공산화]] 흐름에 올라탔고, 서로간의 민족 감정을 부추기며 나라를 절단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90년대가 다가왔고, [[유고슬라비아 전쟁|우리는 그 결과를 너무나도 잘 알고있다.]] 이렇게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전체가 막장으로 치달으면서 소련이 [[아돌프 히틀러|히틀러]]의 [[나치 독일|제3제국]]처럼 살아남으려 마지막 발악을 치는 게 아니냐는 일부 우려도 나왔지만, 소련은 미국과 NATO를 향해 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1991년, 소비에트 건국의 주요자들이 퇴직하며 등장한 [[노멘클라투라]]-[[올리가르히]]들은 [[보리스 옐친]]을 뒤에서 지원했고, [[옐친]]을 비롯한 각 공화국 지도자들이 [[벨로베자 조약|강제로 소련을 해체]]하고 본인들의 입맛에 맞게 러시아를 건국함으로써 냉전 또한 막을 내렸다. 이로써 세계멸망의 위기는 사라지는듯 해 보였다. 세계를 양분했던 두 거대 세력의 대결치고는 한쪽의 일방적인 궤멸로 마무리가 허전한 감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소련이 사라지면서 냉전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소련이 갈가리 찢어진 이후 개혁과 개방의 바람이 종주국이었던 다른 공산권 국가들 사이에서 크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국]]과 [[베트남]] 같이 공산국가이긴 했지만 소련의 영향 아래 있지는 않았던 공산국가들도 차차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이나 [[베트남]]의 도이머이 운동과 같은 개방 정책으로 선회하였으며 동유럽의 일부 국가들은 서방의 [[EU]]체제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물론 소련 해체로 인해 새로 생겨난 신생국들인 [[발트 3국]], [[벨라루스]][*구소련 다만 이들 국가는 과거 소련 시절에도 별도로 UN에 가입한 바 있을 정도로 소연맹 내부에서 사실상 국가 취급을 받긴 했다.], [[우크라이나]][*구소련 다만 이들 국가는 과거 소련 시절에도 별도로 UN에 가입한 바 있을 정도로 소연맹 내부에서 사실상 국가 취급을 받긴 했다.], [[몰도바]]등은 소련 해체의 부작용으로 인해 부흥은 커녕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려야만 했으며, 발트 3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아직도 소련 시절에 비해서 경제가 영 좋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예 [[유고슬라비아]]나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유고슬라비아 전쟁|아예 국토 전체가 인간 도살장이 되거나]] 소련처럼 [[체코|나라가]] [[슬로바키아|분절되기도]] 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북한]]처럼 [[사회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막장으로 개조시킨 [[김일성-김정일주의]]로 문을 닫아건 나라도 있다(...). 위 내용을 종합하여 본다면, 세간에 알려진바와 달리 미국이 냉전 말기에 냉전을 이기기 위해 큰 공작을 한 것도 아니고 냉전 승리를 주워먹은 것이 맞다. 소련에 강경하던 레이건 정권도 고르바초프 집권 직후 대소 강경 정책에서 유화 정책으로 돌아섰다.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르며 강경하던 레이건도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고 개혁적인 모습을 보이자 소련을 비난하여 자극하지 않고 유화 정책을 펼쳤다. 비록 레이건이 [[상호확증파괴]] 개념을 극단적으로 싫어해 [[SDI]]에 집착해서 SDI 포기를 요구하는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에서 갈등이 있었지만 레이건은 SDI 기술을 소련과 공유하겠다며 미국과 소련이 SDI를 공유하면 핵무기가 무력화되어 결국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게 될 거라는 이상론을 주장했다(...). 사실 2차 집권기의 레이건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모든 핵무기를 폐기해야 된다고 수시로 주장했고 화성인이 침공하면 미국과 소련이 힘을 합쳐야 할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극단적인 강경파도 아니었던 닉슨도 2차 집권기의 레이건이 지나치게 소련에 유화적이라고 레이건을 비판하기도 했다.] 비록 SDI 문제로 갈등이 있었지만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INF 협정을 체결했고 레이건은 소련을 방문해서 더 이상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베를린에서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장벽을 허무시오!"라는 명연설을 하기는 했지만 [[립서비스]]였고 레이건은 2차 집권기에 냉전 승리를 위해 특별히 큰 공작을 하지는 않았다. 이후 부시 집권기에도 미국은 소련에 유화 정책을 펼쳤다.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위성국들이 민주화되자 미국은 환영했지만 동유럽 공산 정권 붕괴를 위해 큰 공작을 하지는 않았고 소련의 [[브레즈네프 독트린]] 폐기로 위성국들의 공산 정권이 무너졌다. 미국은 동유럽 민주화와 독일 통일에 만족하고 나토를 확장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이후 소련이 소수민족들의 독립운동으로 흔들렸지만 미국은 독립운동 지원은 커녕 소련 붕괴 직전까지도 소련의 내전을 우려하며 오히려 독립 요구를 말리려 했다. 1991년 7월에는 양국이 전략무기를 감축하는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I (1991.7.31)|제1차 전략무기감축협정]]을 맺었다. 8월 쿠데타 전에는 공산당의 권력이 살아 있었고 소련이 평화적으로 붕괴될 거라고 예상하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전에는 고르바초프의 요청으로 부시는 우크라이나에서 독립 반대 연설을 했다. [[콘돌리자 라이스]]가 쓴 이 연설에서 부시는 미국은 독립운동을 지원하지 않을 거라며 독립운동을 자기파괴적인 민족주의라고 발언해 미국 보수파들에게 비판받기도 했다. 이후 2000년대 아버지 부시는 당시 독립운동을 노골적으로 미국이 지원해서 독립운동이 과격해졌다면 전쟁이 날 수 있었다고 해명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