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탐라 (문단 편집) === [[고려시대]] ===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2년여가 지난 938년 탐라국주 고자견은 태자 [[고말로]]를 보내 고려에 입조하여 형식상 속국이 되었으며, 이에 고려 태조는 신라의 예에 따라 탐라에 성주와 왕자의 관작을 제수하였다. 탐라가 신라나 고려로부터 관작을 제수받은 것은 지방 호족 세력이 한반도의 패권을 가진 중앙정부에 입조하여 탐라 지방의 지배력을 인정(책봉)받았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고려 초기까지는 사실상의 독립국이었다. 그러나 지방 호족을 고려의 지배 체계에 편입시키며,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시켜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탐라국 역시 차츰 고려의 지방 행정 단위로 편입되었다. 처음으로 설치된 '제주'라는 명칭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탐라인이 고려 '''[[빈공과]]'''('''賓'''貢科 : '''외국인을''' 자국의 관료로 임용하기 위하여 치르던 시험.)에 합격하거나, 탐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간관에 임명되지 못한 [[고유(고려)|고유]]의 사례처럼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고려와는 별개인 속국 취급을 받는 등 자치는 허용되었다. 1105년 [[숙종(고려)|숙종]] 시기에 탐라국은 '''탐라군'''으로 개편되면서 속국 지위가 박탈되었고, 본토에 있는 중앙 정부의 통제권에 들어왔다.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지방관과 탐라 현지인은 갈등을 빚었으며 결국 1168년 [[양수의 난]]으로 폭발했다. 하지만 '성주'는 여전히 대를 이어 세습되었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은 계속 허용되었다. 고려 말 [[목호의 난]] 진행 과정에서도 목호 측과 고려 진압군 측 모두 명목상 탐라의 지배자인 탐라 성주를 회유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고려 중기 이후의 탐라는 사실상 고려에 복속했지만 아직 독립국가의 성격도 일부 가진 이중적인 정체성을 가진 지역이었다. 고려사절요 제13권 명종 광효대왕편에 따르면, 탐라국 내에서도 정쟁이 일어났는데, 본래 양씨가 '왕자'를 제수받았지만 정작 마지막 왕자의 이름은 문충세(文忠世)였다. 오히려 왕자 작위를 세습한 성씨는 문씨가 더 많다. 이렇게 된 사연은 좀 길다. 탐라국은 명목상 고씨 성주가 군주였지만 사실상 서쪽 반만 성주의 영토, 동쪽 반은 양씨 왕자의 영토, 수도는 공동 통치였다. 화산재 때문에 농사가 어려운 동부보단 서부가 항상 더 강했지만 성주들은 이에 만족못하고 외국인 고려에서 과거를 보고 관직까지 얻을 정도로 중앙의 조정에 협조해서 지원을 받았다. 조정은 덕분에 고씨와 양씨가 분열한 틈에 탐라국을 속국화시키고, 고씨 성주는 탐라국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얻는 윈윈 전략이었으나 이들에게 부림당하는 탐라인들과 토호들에겐 의문의 2패가 되었다. 그러다 [[무신정변]]으로 고려가 막장이 되니 성주는 반발하는 토호들을 찍어누를 수 없게 되었고, 왕권 유지를 위해서 육지 이주민 가문인 문씨와 결혼 동맹을 맺었다.[* 부연하자면 [[남평 문씨]]는 육지 이주민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제주도와 가까운 [[나주]] 일대의 가문이었다.] 고려사절요 제13권에 따르면, "고려 명종 1194년 탐라국에 파견되어 중앙 문물을 제주에 전파하는데 공헌하였다. 문탁의 5세손 문창우가 제주고씨의 사위가 되면서 탐라의 왕자직을 세습하였다. 근래에 연구진에 의해 복원된 씨족원류 및 동문선의 복원에 따르면, "문탁의 5세손이자, [[문극겸]]의 장남 문후식의 차남인 문착(文𧨳)부터 문양부(文陽夫), 문영희(文永禧), 문신(文愼), 문창우(文昌祐), 문공제(文公濟), 문승서(文承瑞), 문신보(文臣補), 문충걸(文忠桀), 문충세(文忠世)로 이어지는 왕자직 세습으로 고씨 양씨의 성주가문에 버금가는 가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현재 문탁의 묘소는 없어졌지만 후손들이 하가리에 사당을 세워 문탁을 추모하고, 역사적 사료를 연구진에 공유했다.] 여기서, 뜬금없이 남평 문씨가 등장하는 이유는 탐라 서쪽의 고씨 세력이 탐라 동쪽의 양씨 세력에게 위협받자, 육지의 세력인 고려의 중앙정부 귀족들과 권력적으로 연대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는 무신들간의 다툼으로 혼돈의 상태에 놓여있었기에, 무신들에게 잘못 줄을 대었다가는 역으로 숙청될 위험이 높았다. 따라서 문신 출신이면서 무신들과 가깝고, 또한 지리적으로 제주도에 가까운 남평(나주)의 문씨가 정치적 차선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고려사절요 제14권에서 제17권 그리고 고려시기의 씨족원류에 따르면, 제주 고씨는 탐라에서의 지위를 지키고자 재상이자 상장군이었던 [[문극겸]]에게 지속적으로 접촉하였고, 문극겸의 아들들인 문후식, 문유필때 되어서야(고려 고종시기) 군사와 친족을 보내어 제주 양씨를 축출하고 제주 고씨는 탐라의 서쪽, 남평 문씨는 탐라의 동쪽으로 함께 권력을 분점했다. 그 결과, 제주 고씨는 고려의 중앙정부와 연줄을 대고, 지속적으로 성주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남평 문씨는 약 400년간 탐라의 동쪽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몽골의 침략에 대한 것이 있다. 당시 고려가 더더욱 혼돈 상황이 된 끝자락 쯤, 고려의 빽이 완전히 증발한 성주 고적을 왕자 양호가 끌어내리고 성주에 올랐다. 다수의 탐라인들과 성주 양호는 탐라국의 자주 독립을 목적으로 [[삼별초]]의 대몽 항쟁을 도왔고, 1인자 자리에서 밀려난 고씨와 고려중앙정부에서 혼인동맹으로 맺어진 문씨는 자신들의 권력을 보장해줄 여몽 연합군을 지원했다. 최종적으로 [[김통정]]이 이끌었던 삼별초가 전멸하면서 이때부터 고씨가 다시 성주를 차지하고 동맹인 문씨에게 왕자의 자리와 왕자의 영토인 섬 동부를 주었으며, 이 문씨의 왕자 직위가 조선 시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몽골 제국]]과의 [[여몽전쟁]] 시기에는 [[삼별초]]가 제주도를 점령하여, 최후 항전지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1273년 4월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를 진압하였고, [[몽골]] 간섭기에는 말을 키우기 좋은 환경에 주목해 [[탐라총관부]]가 설치되어 요양행성 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빼앗긴 [[충렬왕]] 시기에 일단 반환받았다. 고려에서는 1295년부터 탐라라는 이름을 '(바다를) 건너야([[濟]]) 갈 수 있는 고을([[州]])'이라는 뜻의 '제주'로 고치고 지방관인 목사를 파견하는 '제주목'으로 행정단위를 재설정했는데, 한편 원나라와 외교관계 하에서 탐라는 지방관인 만호가 파견되는 [[탐라만호부]]로도 기능했다. 공민왕이 즉위한 뒤 반원 정책을 펴자 제주에 남아 있던 몽골인 목호(牧胡)[* [[목호]]는 제주도에서 말을 기르던 몽골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담으로, 제주도 향토사학자인 [[이영권]]이라는 사람은 이 사건을 두고 고려시대 버전 [[4.3 사건]]이라고 했다. 제주도에 살았던 몽골인 목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고려군에게 진압되면서 애꿎은 제주인들 일부가 몽골인으로 오인받아 학살당하자, 몽골계 귀화인([[초(성씨)|제주 초씨]]나 [[좌(성씨)|제주 좌씨]] 등)과 제주도 토착민 등이 자신들이 몽골인들과 연관되었음을 필사적으로 부정했는데, 이것이 현대의 4.3 사건 당시에 [[공산주의|공산주의자]]로 오인받아서 제주도민들의 상당수가 학살당한 후에 제주도에서 [[반공주의]]가 확산된 것과 절묘하게 똑같아서 그렇다고 한다.]들은 불만을 가졌고, 1374년 [[목호의 난]]이 일어나 [[최영]] 장군이 진압군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려 정부, 몽골, 삼별초 등이 탐라국을 계속 뺏고 빼앗았지만 그 동안에도 탐라성주는 계속 존재했다. 탐라의 토호인 성주와 왕자는 고려와 원나라에서 보내는 지방관들에 밀려 지역의 실제적 통치권을 서서히 잃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362년에 성주 [[고복수(탐라국)|고복수]]가 목호들과 반란을 일으키거나, 1386년 고려가 성주 [[고신걸]]과 그 아들 [[고봉례]]를 개경에 억류해두고서야 비로소 탐라가 귀순했다고 평한 것을 보면 고려 말 제주(탐라) 성주가 허울뿐인 직책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