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탕사오이 (문단 편집) === [[신해혁명]] === 1901년 이홍장이 죽은 다음에 [[서태후]]의 명으로 산동순무 위안스카이가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에 임명되었는데 위안스카이는 직예성에 부임하면서 탕사오이를 데리고 갔다. 1907년 총리대신 경친왕 [[아이신기오로 이쾅]]으로부터 봉천순무 자리를 받았으며[* 이때 같이 임명된 것이 [[돤즈구이]]였는데 흑룡강 순무로 임명되었다가 조정에 엄청난 뇌물을 뿌린게 걸려서 쫓겨났다.] 위안스카이의 추천으로 승진을 거듭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터진 이후 1911년 12월 7일 전권대표 위안스카이로부터 협상 총대표로 임명되어 혁명당의 [[왕징웨이]], 오정방, 온종요 등과 협상했다. 혁명당이 공화정을 승인해야 회담을 시작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이를 위안스카이에게 알렸고 탕사오이는 국민대회를 열어 공화정과 입헌군주정 중 하나를 결정하자고 제안했고 융유태후, 위안스카이 등도 이에 동조했다. 하지만 [[쑨원]]이 난징에서 임시대총통에 추대되자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멀어졌다고 여겨져 국민회의 방안을 승인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이에 탕사오이는 총대표에서 사직했다. 혁명당은 위안스카이에게 공화정만 승인한다면 위안스카이를 총통으로 추대하겠다고 약속했고 위안커딩, 탕사오이, 양사기, 장건 등은 위안스카이에게 결단할 것을 촉구했다. 결국 1912년, 위안스카이와 혁명당의 협상이 완료되어 [[선통제]]가 퇴위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자 탕사오이는 중화민국 임시 약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초대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탕사오이가 동맹회에 가입한 상태였기 때문에 난징의 임시참의원도 탕사오이를 흔쾌히 인준하였다. 남방의 혁명당은 교육총장 채원배, 사법국장 [[쑹자오런]], 외교차장 우신조, 참모차장 유영건, [[왕징웨이]] 등을 탕사오이와 함께 베이징으로 파견하여 위안스카이로 하여금 난징에 남하할 것을 촉구했지만 위안스카이는 씹었다. 1913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때 7개 당적을 동시 보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