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탕사오이 (문단 편집) === [[국민혁명]]과 [[반장전쟁]] === 1924년 [[2차 직봉전쟁]]과 [[북경정변]]을 통해 임시 집정에 추대된 돤치루이는 국민회의 소집을 주장하는 쑨원을 무시하고 [[선후회의]]를 소집했다. 돤치루이는 장병린, 리위안훙, 량치차오 등과 함께 탕사오이에게 선후회의 참가를 요청했으나 탕사오이는 거절했다. 1925년 [[국민정부]]가 수립된 이후 국민정부 감찰위원회 위원 겸 정부위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이 [[국민당의 1차 북벌|북]][[국민당의 2차 북벌|벌]]을 일으켜 중국 천하를 장악한 후에는 반장파에 속했고 1929년 중산현 훈정실시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여 중산현을 전국의 모범현으로 만들겠다고 선전했다. 1930년 1월 정부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30년 3월 [[중원대전]]이 발발하자 [[옌시산]]의 베이핑 국민정부 정부위원에 선출되었다. 1931년, 중산현 현장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2월, 장제스가 [[탕산 사건]]을 일으키자 이에 반발한 [[서산회의파]], [[개조파]], [[계계군벌]], [[월계군벌]]이 연합하여 일으킨 [[1차 양광사변]]에 참여하여 광저우 국민정부 정부위원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고 12월에 장제스가 하야하면서 1932년 1월 1일 광저우 국민정부는 난징 국민정부와 재통합했다. 1931년 12월 28일 제4기 1중전회에서 탕사오이는 중악마찰위원 겸 국민정부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린썬]]이 정부주석, [[쑨커]]가 행정원장이 되었다. 탕사오이는 [[리쭝런]], [[후한민]], [[천지탕]] 등 60여명과 연명하여 광저우의 중국 국민당 비상회의와 국민정부 취소를 통전하고 당권을 중앙에, 통치권을 통일정부에 돌려준다고 선포하고 4전대회의 결의에 따라 중앙집행위원회 서남집행부, 서남정무위원회, 서남군사위원회 분회를 설치하여 [[초공작전]]에 노력하겠다고 하였고 그 자신도 서남정무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양광 지역은 1936년 [[2차 양광사변]]이 터질 때까지 반독립적인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1936년 [[2차 양광사변]]으로 서남정무위원회가 취소된 이후에는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