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탕성즈 (문단 편집) ===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 ===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베이핑, 톈진 등이 함락되어 화북이 무너지는 한편 [[제2차 상하이 사변|상하이 전투]]에서 국민당군이 패배하면서 난징은 바람 앞에 등불이 되었다. 결국 모두가 난징을 사수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난징에서 철수하기로 하였는데, 탕성즈만이 난징을 적의 손에 쉽게 넘겨줄 수 없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장제스도 동의하여 탕성즈가 휘하의 15만 병사들을 거느리고 난징을 사수하기로 했다. 하지만 탕성즈 휘하의 병사들은 상하이에서의 패전으로 겨우 수습한 패잔병들이 대부분이라 무기와 사기가 형편없었다.[* 그래도 13만명 이상이 있었고 또 당시 아시아 최강이라 할 수 있는 독일식으로 훈련받은 87, 88사단과 [[두위밍]] 산하의 장갑병단이 있었다. 독일식 훈련을 받고 독일제 무기를 쓴 이 부대는 비록 상당수가 상하이에서 갈렸지만 그래도 꽤 살아남았고 이들의 정신상태 및 전투력은 일본군을 압도해 독일식 사단을 중심으로 성 외 요지를 요새화 해 지연전을 했더라면 중국에게 더욱 유리했을거라는 게 역사학자들 대부분의 의견이다.] 게다가 탕성즈는 성벽 안에서의 싸움만을 고집하여 성바깥에서 지형을 이용한 지연전을 펼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결국 일본군이 공격해오자 탕성즈는 최후통첩을 무시하고 항전하여 그대로 [[난징 전투]]로 이어진다. 한동안 잘 맞서 싸웠지만 일본군이 성문을 폭파하고 독가스를 살포하여 방어선을 무너뜨리자 결국 전군에 후퇴 명령을 내린다. 문제는 후퇴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는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 병력을 방기하고 도주해버렸다는 것이다. 일본군은 상하이에서 고생했던 것을 복수하겠답시고 무차별적인 학살과 강간을 벌여 20세기 최악의 학살 중 하나인 [[난징 대학살]]이 벌어지게 된다. 전쟁 말기에 일본군이 몰락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룽윈]] 등과 함께 반장운동을 재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