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탕성즈 (문단 편집) === 후난군벌 시절 === ||[[파일:젊은 당생지.jpg]]|| || 젊은 탕성즈 || 1889년 후난성 융저우의 풍안현에서 부유한 상인 및 관료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7년에 서당에 들어가 고전학문을 배웠다. 1908년 후난 육군 군비 학당에 들어갔으며 우수한 성적을 거뒀으나 [[광서제]]의 죽음을 추도하는 행사에서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아 처벌당했다. 1909년 후베이 우창의 3군 중학교에 들어갔으며 같은 해에 동맹회에 들어갔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이에 참여했고 1912년 바오딩 무관학교 보병과에 1기로 입학했으며 1914년 졸업했다. 이후 [[호국전쟁]]과 [[호법전쟁]] 등에 참여했으며 1920년 11월 [[자오헝티]]가 호남내전이라고도 하는 [[담조전쟁]] 끝에 [[우페이푸]]의 지원을 받아 탄옌카이를 몰아내고[* 자오헝티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탄옌카이는 휘하의 병력을 인솔하여 국민당에 합류하였고 자신의 군사력을 담보로 거기서 상당한 지위를 확보했다.] 후난의 지배자가 되자 휘하의 4사단장이 되었다. 하지만 후난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직예파와 결탁한 자오헝티의 결정은 직예파가 후난에 간섭하며 후난의 자치를 취소하고 자신의 밑으로 들어올 것을 간섭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이 때문에 후난 군벌들이 일관되게 추진해왔던 후난 자치의 기치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동시에 국민당 역시 후난이 북벌을 위한 주요 통로였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924년 1월에 개최된 국민당 1전대회에선 후난성 대표들도 참여했는데 그 중 한명이 [[마오쩌둥]]이었다. 공산당원이 중심이 된 국민당 세력은 후난성 깊숙히 대중운동을 벌이며 침투하고 있었다. 당시 탕성즈는 자오헝티 휘하의 바오딩 군관학교 출신의 정예부대 지휘관들이 속해 있던 호남 신파 소속으로 창더에 주둔하며 신파 군관들 사이에서 인기와 명망을 얻고 있었다. 당시 단기군관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된 호남 구파 세력이 탄옌카이를 지지했기 때문에 담조전쟁이 자오헝티의 승리로 끝나자 신파의 영향력은 더욱 세졌다. 특히 탕성즈는 자신을 따르는 신파 군관들을 규합하여 자오헝티의 집권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입지가 더욱 탄탄했다. 자오헝티는 호남 접수 이후 군대 개편 작업에 착수했는데 탕성즈가 지휘하던 4사단은 예카이신(葉開鑫, 섭개흠)이 지휘하는 3사단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부대였다. 탕성즈는 4사단을 중심으로 후난 지방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페이푸 휘하의 우한 병기공장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부하들을 무장시켰고 군비를 마련하기 위해 후난의 특산물을 판매하였다. 또한 1924년에 경쟁군벌들을 한차례 섬멸하고 이들의 잔여 세력을 흡수함으로 탕성즈 세력은 크게 성장했다. 탕성즈는 군관강습소를 설치함으로 군관을 양성하는 한편 불교를 강요하여 병사들을 신앙심으로 묶으려 했다. 군사력 강화 외에도 치안 확보와 광산 개발, 학교 설립, 식목 사업, 구황을 실시하는 등 개혁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후난의 관료제를 대대적으로 점검하여 세금과 예산 누수를 최소화했고 도로를 정비하고 토목공사를 벌임으로 자신이 민생에 신경 쓰고 있음을 홍보했고 후난의 민심이 그를 자오헝티를 대신할 수 있는 인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쏠리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