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탕성즈 (문단 편집) === 국민당에 합류하다 === 한때 자오헝티의 믿음직한 심복이었던 탕성즈는 독자적인 세력 구축과 국민당과의 접촉으로 인하여 믿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광저우의 국민당은 탕성즈를 주목하여 그와 개별적인 접촉을 시도했는데 이러한 접촉은 탕성즈가 4사단장에 임명된 후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다. 탕성즈는 수십명의 군관을 황푸군관학교에 파견하여 그곳에서 훈련을 받게 했고 국민당도 탕성즈가 파견한 장교들은 무조건 입교시킬 정도로 그와 긴밀히 협조했다. 탕성즈의 동생인 탕성밍도 황푸군관학교 4기 졸업생이 되었다. 이는 국민당이 탕성즈의 잠재력을 주목했다는 것과 더불어 황푸군관학교에 탕성즈처럼 바오딩 군관학교를 졸업한 바오딩 인맥이 많았다는 것이 크게 한몫했다. 그러다가 1925년 7월 [[리쭝런]], 황소횡, [[바이충시]] 등 친국민당 신계계 군벌들이 광서성을 장악하고 국민당에 입당하여 군사적 합작을 실시하자 학맥과 동향관계로 신계계와 유대관계를 맺고 있던 탕성즈와 국민당의 관계도 급진전되었다. 이들 신계계 군벌들은 인맥, 학맥을 동원하여 탕성즈와 국민당 간의 합작을 종용했고 자오헝티 밑에서 독립하고 싶었던 탕성즈도 국민당과의 합작에 적극적으로 나옴으로 양자간의 관계는 크게 밀접해졌다. 이에 1925년 11월에는 탕성즈가 황소횡을 통해 [[삼민주의|손중산주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든가 심복을 파견해 국민당에 연락처를 마련했다든가 하는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 한편 자오헝티는 광서 군벌들에게 같이 힘을 합쳐서 국민당을 치자고 회유하면서 심복을 파견했는데 그 심복이 탕성즈의 친구이기도 해서 탕성즈가 자오헝티를 대신하여 후난을 차지할 야심이 있다는 의사를 타진하는 것을 도왔다. 리쭝런은 광둥, 광서, 호남 합작을 선전하며 왕징웨이 등과 탕성즈의 접촉을 조율했다. 국민당은 탕성즈에게 자신들의 연합전선에 참여할 것을 제의하며 7가지 조건을 내밀었고 탕성즈는 그 조건을 수용했음은 물론, 자신이 국민당을 지지한다는 표시로 2천원의 성금을 보내기도 했다. 한편 탕성즈는 자오헝티의 측근정치에 혐오감을 느껴 자오헝티를 멀리 했고 이 때문에 자오헝티와의 관계가 멀어졌다고 주장했는데 1925년 12월 자오헝티가 탕성즈의 세력 약화를 위해 호남의 재정과 군사를 통일하려는 개혁을 실시하려 하자 탕성즈는 크게 반발했다. 자오헝티와의 사이는 멀어지고 국민당과의 사이는 가까워진 상황에서 때마침 1925년 5.30 사건으로 벌어진 반제국주의 운동이 후난까지 확산되자 그가 국민당에 합류해야 할 이유는 더욱 명확해졌다. 국민혁명 운동의 확산으로 자오헝티마저도 각 학교에 삼민주의를 가르치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자오헝티는 이로써 후난의 반제운동을 억제하고 국민당의 북벌을 면해보려 한 모양이었지만 미흡한 조치였다. 1926년 3월 9일 국민당 호남성 당부는 3만명 규모의 시민대회를 개최하고 자오헝티에게 24개조 요구 조건을 제출했다. 이는 호남자치를 내세운 자오헝티 군벌 정권의 해체와 국민혁명에 투신할 것을 요구하는 매우 급진적 요구였고 자오헝티가 받아들일 수 있을리 만무했다. 때맞춰 탕성즈는 법회에 참가한다는 구실로 병력을 집결시켰고 자오헝티의 근거지인 창사를 향해 진군했다. 1926년 3월 11일 사태를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자오헝티는 "성헌자치가 실패한 게 다 성장 자리 탈취하려는 탕성즈 때문이지만 나는 피 흘리는 걸 보기 싫음으로 사퇴한다"며 모든 권한을 탕성즈에게 대행시키고 자신은 창사를 떠남으로 탕성즈는 후난의 지배자가 되었고 3월 26일 공식적으로 성장에 취임했다. 국민당도 때맞춰 탕성즈에게 각종 정치적 보장 및 지지, 후난에서 축출된 탄옌카이와의 관계 등에 대해 입장을 전달해 왔고 탕성즈는 국민당에 합류할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탕성즈는 섣불리 국민당 합류를 선포했다간 우페이푸를 자극할 것을 두려워하여 입장을 공개하진 않았다. 하지만 자오헝티 휘하의 3사단장 예카이신은 탕성즈에 굴복하지 않고 3사단을 규합하여 탕성즈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탕성즈도 자신을 반대하는 군관들을 체포하란 명령을 내림으로 양자간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수순에 이르렀다. 결국 예카이신은 우페이푸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고 5월 초에 탕성즈는 창사에서 축출되었다. 예카이신은 자오헝티의 복귀를 요청했으나 이미 [[장쭤린]]에게 의탁한 상태였던 자오헝티는 거절했다. 결국 선택지가 없어진 탕성즈는 휘하의 병력 1만명을 이끌고 장제스의 북벌군에 합류, 8군 사령관이 되어 [[국민당의 1차 북벌]]에 공식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