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탕성즈 (문단 편집) ==== 우한 점령 ==== 이후 1926년 8월 우한 공격에 있어 탕성즈는 중앙군 총지휘를 맡았다. 이 시기에 이르러 탕성즈에 저항하던 잔여 후난군벌들도 모두 국민당에 합류했다. 1927년 3월 예카이신도 국민당에 합류하여 국민당 5군에 편입되었고 격전 끝에 우한과 호북의 주요 요충지들이 모두 함락되면서 우페이푸는 완전히 몰락했고 국민당은 호북 지역을 장악했다. 호북과 호남의 민중들도 자경단을 결성하는 한편 국민당의 북벌에 적극적으로 합류했다. 한편 우한은 점령하는데 큰 공을 세운 탕성즈의 정치적 지위는 올라갔으나 그만큼 총사령관 장제스와의 정치적 대립도 심화되어갔다. 우선 우한 공격에 광동 출신 4군이 참여하는데에 탕성즈는 반대를 표한 바가 있으며 이후 중국 최고의 군수공장 중 하나인 한양병기창 장악을 두고 장제스와 탕성즈는 대립했으며 결국 4군은 우한 공격에 동원되었으나 정쟁으로 인해 우한 함락은 다소 늦춰졌으며 한양병기창은 총사령관 휘하의 우한 행영에 배속되었고 병기창의 무기들은 고루 분배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원래 탕성즈는 소련고문들의 불신과 장파쿠이를 비롯한 우페이푸 군대의 견제로 인하여 장제스와 대항할 힘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으나 호북에서 항복한 병사들을 대대적으로 흡수하면서 세력이 급격히 확장되었고 이 때문에 장제스와 자웅을 겨뤄 볼 정도의 세력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일본, 소련, 공산당에도 우호적 제스처를 보내면서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려 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탕성즈가 수구 군인들의 축이라 여겨 그의 입당을 거부했고 탕성즈 역시 자신의 군대가 급속히 공산화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1927년에 이르면 탕성즈는 무려 3개 군을 거느리게 되었고 장제스는 반장 세력의 폭발을 우려하여 탕성즈의 여러 강력한 요구들을 부하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수용하였다.[* 예컨대 자신 휘하의 사단장들을 군단장으로 승진시켜 달라는 요구를 했다.] 이에 여러 군벌들이 너도나도 승격을 요구하여 우한에만 무려 7개 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강서에 주둔한 광서 파벌들은 소외감을 느끼고 반장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강서 공격 도중에 [[천궁보]] 등이 장제스를 대신하여 탕성즈의 우한 군정 장악을 저지하고 소련에서 보내온 원조 물자의 배분, 군비의 배당 문제 등에 있어 7군과 8군 등은 장제스에게서 소외되어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예컨대 장제스가 탕성즈에게 지급하기로 약속한 군비는 2700만원 중 30만원이었지만 그나마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탕성즈가 자체조달하고 있었고 소련에서 지원한 무기들은 대부분 장제스가 독점했다. 흔히 장제스가 중일전쟁 때 미국 원조물자를 독점했니 어쩌니 하지만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 그랬던 것은 중일전쟁, 국공내전 중이 아니라 군벌전쟁 와중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