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탕성즈 (문단 편집) === [[4.12 상하이 쿠데타]]와 우한 정부 참여 === 그러던 중 1926년 11월 26일 국민당 중앙정치회의가 정부를 우한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면서 12월 13일 국민정부위원, 중앙집행위원들이 모여 우한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이 때문에 난창을 수도로 삼자고 주장한 장제스와 우한정부는 격렬한 마찰을 빚게 됐고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장제스의 정치적 권위를 무시하고 난창의 중앙집행위원을 우한으로 옮겨버렸다. 우한정부를 설득하려던 장제스의 우한 방문은 실패로 끝났고 오히려 쟝제스를 옆에서 보좌하던 바실리 블류헤르는 장제스를 따라가지 않고 우한에 잔류함으로 장제스의 입지는 계속 축소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우한정부는 군권이 당권을 제한하는 것을 방지한단 구실로 국민당 3중 전회가 결의안을 통과시켜 장제스의 권한을 대거 회수했다. 장제스는 이것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로 받아들이고 극도로 분노하여 집기를 부수며 가히 발광하였다. 한편 탕성즈는 국민당 최고의결기구인 임시연석회의에 참여하게 됨으로 입지를 굳혔다. 4월초 군사위원회는 장제스의 군사권을 약화시키고 국민혁명군을 집단군체제로 개편, 탕성즈를 제1집단군 4방면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이로써 탕성즈는 우한국민정부의 군사적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1926년 12월 3일 탕성즈는 호북 서부지역(악서) 작전 동원령을 선포하면서 군비 120만원을 요구했다. 결국 12월 13일 임시연석회의 1차 회의는 탕성즈의 호북 서부지역 진공 작전을 승인했고 4개 군을 주었다. 장제스는 탕성즈에게 20만원의 군비를 할당하면서 [[쑹쯔원]] 등과 연계하여 탕성즈의 독주를 견제하려 했다. 이에 탕성즈는 불만을 토로하며 군비지급을 요구했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8군의 군비를 우한 정부가 지불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1927년 1월의 난창회의에서 탕성즈는 그간 원했던 8군의 확편과 군비 확보를 얻어냈다. 장제스가 점령하고 있던 강서는 부유한 지역이 아니라서 장제스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우한도 노골적으로 장제스를 견제하기 위해 탕성즈의 편에 섰다. 결국 장제스는 발악적인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후 장제스가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하면서 우한 정부와 난징 정부의 대립 시기가 열리게 되었다. 한편 광저우에서도 4.15 쿠데타로 광저우와 우한의 연계가 끊기며 우한 정부는 재정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이에 우한 정부는 위기를 타개하고자 [[펑위샹]]과 동맹을 맺고 북벌을 재개했으며 총사령관으로 탕성즈를 임명하였다. 우한 정부는 허난의 지배권을 펑위샹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펑위샹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려 했고 탕성즈는 이에 군대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탕성즈는 하남에서 하남의 재원을 확보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선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탕성즈 휘하의 허극상, [[허젠]] 등이 잇달아 봉기하는 등 [[마일사변]]으로 우한 정부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펑위샹은 얼마 안가서 장제스와 손을 잡아 버렸고 우한 정부가 [[국공결렬]]을 선택하면서 우한과 난징의 대립은 누가 더 군사적으로 우세한가에 정통성이 갈리게 되었다. 1927년 6월 우한 정부는 병력을 재편하여 탕성즈와 [[장파쿠이]]를 중심으로 4집단군을 편성해 난징 정부를 무력으로 복속하고자 했다. 8월 7일 장파쿠이가 난창을 점령하고 12일에 탕성즈가 안경을 점령했는데 때맞춰 [[봉천군벌]]들이 장제스를 압박하면서 장제스는 위기에 몰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