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탕위린 (문단 편집) === 초기 이력 === 1871년, 현재의 랴오닝성에 성하는 청나라 열하성 조양에서 태어났다. 뭔래 마적질을 하다가 1902년, 청군에 귀순하여 봉천 순반영 방판을 지냈으며 조이손이 동삼성 총독에 부임하자 [[장쭤린]]의 배려로 봉천 강무당을 졸업했다. 중화민국 건국 후 [[장쭤린]]이 [[위안스카이]]에게 잘 아첨한 대가로 봉군 27사단 산하 27 기병연대장을 거쳐, 52여단장을 지냈다. 1917년 [[장훈복벽]]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했다가 [[돤치루이]]가 복벽을 진압한 후 은거했고 1919년 [[장쭤린]]에게 의탁하여 11여단장을 거쳐 동변진수사 겸 7여단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안직전쟁]]에서 베이징에 입성하여 [[안휘군벌]]들이 두고 간 막대한 양의 군수품을 노획하는 공을 세웠고 이 때문에 [[직예군벌]]의 수장 [[차오쿤]]과 [[우페이푸]]를 분노케했다. 1924년 5월 19일,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만주를 방문했을 때 지방 수비대가 그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때문에 격노한 일본 측이 만주 내부의 한국 독립군을 단속하라고 지시하자 1924년 6월 말, 통화 지방을 순시하고 압록강변에서 한국 독립군들이 상당수 세력을 구축하였다고 보고한 후 부대를 이끌고 독립군을 토벌했다. 1924년 [[2차 직봉전쟁]]에서 11사단을 지휘하여 참전했다. 이후 1925년 6월 11일에는 [[미쓰야 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이 때문에 한국 독립운동사를 파는 사람들에게 안좋은 이미지로 찍히게 되었다. 1925년에 [[궈쑹링]]이 [[반봉사건]]을 일으켰을때 그에게 합류할 의사가 있음을 타진했지만 궈쑹링은 고압적인 태도로 참의 자리만 주겠다고 하였고 이 때문에 탕위린이 참여를 망설이자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탕위린을 공격했다. 이 때문에 탕위린은 장쭤린에게 다시 충성을 맹세하여 궈쑹링을 진압했다. 반봉사건 진압 후 1925년 12월 29일에 열린 3성 군정회의에 참여하여 하야하겠다고 쑈를 하는 장쭤린을 뜯어말렸다. 1925년 동북국방군이 조직되자 동북국방군 11사단장에 임명되었고 1926년부터 열하도통에 임명되어 1933년까지 7년간 열하성을 지배하였다. 1927년, 안국군 정부가 조직되자 안국군 5방면군 산하 12군 군장에 임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