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탕위린 (문단 편집) === [[만주사변]]과 [[열하사변]] ===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여 길림성과 요녕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흑룡강성도 사실상 무너지자 열하성이 장쉐량이 장악한 사실상 유일한 영토로 남게 되었는데 관동군은 1931년 9월 22일 작성한 <만몽문제 해결책안>을 통해 [[장징후이]],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장하이펑]] 등을 만주의 질서 유지를 위해 필수적으로 포섭할 인물로 지목했다. 이에 따라 관동군은 탕위린에 대한 각종 포섭공작을 실시하였고 이에 탕위린은 1932년 3월 16일, 봉천에서 조직된 동북 행정위원회에 참여하면서 [[만주국]] 건국에도 어느 정도 개입하였다. 이후 [[선통제]] 옹립에 대해서도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 때문에 [[장제스]]로부터 누구보다도 먼저 제거해야 할 간첩으로 지목받았으나 장쉐량은 탕위린을 해임하라는 장제스의 요구를 거절했다. 1932년 12월, 열하성과 하북성에 남은 동북군에 대한 재편 작업이 이루어지자 열하성 병력 2만명으로 편성된 동북군 55군 군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탕위린은 일본의 침략이 목전에 닥쳐 왔음에도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열하성 정부주석 공서에 아편공작을 설치하고 만주의 유물을 약탈하여 톈진의 이탈리아 조계지에서 판매하는 짓이나 하고 있었다. 결국 1933년 [[열하사변]]이 일어나자 재산을 챙겨서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는데 열하에서 그의 학정이 심하여 주민들은 일본군을 반길 정도였다. 참다못한 장쉐량은 탕위린에 대한 체포령을 하달했지만 200명의 호위병과 함께 말을 타고 난평으로 잽싸게 달아나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