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권도/역사 (문단 편집) == 대한태권도협회의 창립 == [[최홍희]]가 태권도라는 명칭을 밀어붙이며 [[대한태권도협회]]가 창립되었다. 6개관이 여기에 참여했는데[* 여담으로 역사에 If란 없다지만 만약 이때 관들이 각자 따로 가서 본인들의 독창적인 무술로 진화했다면, 태권도의 전체적인 파이는 줄었을지 몰라도 다른 근대무술들처럼 신종한국무술 도장들이 지금쯤 국내에 제법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때도 내부에선 최홍희의 행보에 거부감을 느낀 [[무도]]인들이 꽤 있었다. 자기들 [[무술]]에 자부심이 있던 상당수 민간 도장들은 왜 군 인사 최홍희가 민간단체인 자기들 무술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지 모르겠다, 최홍희가 이론적 식견은 몰라도 실제 무술 실력이 높은 인사인지는 알 수 없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명칭에 있어서도 계속 이견들이 오갔다. 그러던 중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박정희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던 최홍희는 군에서 예편당하고 말레이시아 대사로 밀려나 외국을 떠돌게 되었다. 그렇게 최홍희가 쫒겨나면서 최홍희의 대한태권도협회는 와해되었고, 1961년 9월 무술인들은 새로 대한태수도(跆手道)협회를 만들었다. 태수도는 태권도와 공수도·당수도를 절충하여 새로 만든 명칭이었다. 대한태수도협회가 만들어진 후 60년대 초반 말레이시아로 떠난 최홍희와 더불어 황기, 윤쾌병 등 다른 1세대 태권도인들은 서서히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태권도계는 주로 2세대인 이종우와 엄운규가 주도해나간다. 1964년 10월 말레이시아에서 돌아온 최홍희는 1965년 1월 다시 회장직에 복귀하는데 성공한다. 1965년 3월에는 황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른 무덕관 인사들과 연합하여[* 이후 황기는 제자들에 의해 자기가 세운 무덕관에서 제명당한다.(...)] 대한수박도회와 통합한다. 사실상 대한태수도협회가 대한수박도회를 흡수하는 것이었지만 표면적으론 두 단체가 동등하게 통합하는 모양새를 갖췄는데, 최홍희는 이를 명분으로 태수도나 수박도가 아닌 제3의 새로운 명칭을 사용해야할 것을 주장하며 1965년 8월 협회의 이름을 --기승전--대한태권도협회로 바꾸었다. 그러나 회장직에 복귀한지 1년만인 1966년 1월 최홍희는 대한태권도협회 임원들의 불신임을 받아 불명예 퇴진을 당하고 만다. 1966년 3월 국제태권도연맹([[ITF]])이 창립되어 최홍희가 총재가 되었고, 부총재는 노병직, 사무총장은 엄운규, 기술위원장은 이종우가 맡았다. 이종우와 엄운규에 따르면 최홍희를 대한태권도협회에서 물러나게 하는 대신 그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일종의 명예직인 ITF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종우는 곧 최홍희와의 의견 차이로[* 의견 차이를 넘어 이미 감정적으로도 상당히 멀어진 상태였다.] 기술위원장을 사퇴했다. 엄운규는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이 ITF의 사무총장을 했다는 사실조차도 부인했다. 당시 태권도는 국내에서도 겨우 자리를 잡아가던 상황이라 ITF는 창립 당시에는 9개국밖에 안될 정도로 말 그대로 속빈 강정인 조직이었다. 다만 1여년만에 40개국으로 늘어나는 등 수완을 발휘하긴 한다. 1960년대 후반 대한태권도협회는 무술로서 태권도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독창적인(?) [[품새]] 제정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품새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팔괘품새와 유단자품새 17개를 만들었다. 1971년에는 태권도의 이론화, 체계화를 위해 노력했던 이종우의 주도로 "태권도교본(품새편)"이 발간되었다.[* 품새로는 아마 최초. 이전에도 태권도교본은 있었다.] 1971년 1월에는 외교관 출신으로 청와대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YMCA권법부 출신 행정인사 [[김운용]]을 태권도계로 끌여들여 그를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후 김운용은 국제감각과 본인의 외교력을 발휘해 태권도를 성장시키는데 많은 공헌을 한다. 한편, 대태협 품새에 대해서도 본인만의 무술철학이 있던 최홍희는 가라테 냄새가 짙다느니 촌스럽다느니 비판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이에 뿔난 대태협 측이 최홍희가 발간한 태권도 서적에 대해서도 가라테 서적을 표절했다고 비판하는 등 충돌이 이어졌다. 그러다 갈등의 골이 깊어진 1968년 4월 대한태권도협회는 최홍희의 국제태권도연맹(ITF)를 탈퇴하고 만다. 이에 최홍희는 1968년 7월에 태권도진흥회를 결성하여 대한태권도협회에 대항하는 독자적인 협회를 만들려고 했으나 문교부에서 중복단체 설립을 불허했기 때문에 좌절되었다. 최홍희나 ITF 쪽에서는 문교부의 이러한 조치에 대해 정권의 정치적 탄압이라 주장하지만[* 해방 후 좌익 공산주의 활동을 하던 박정희는 군사재판을 받아 사형을 언도받았는데 당시 군 재판관이 최홍희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시작된 악연이라 할 수 있다.], 파벌 싸움 등을 우려해 만들어진 중복단체 설립 불허 방침은 최홍희가 태권도진흥회를 결성하기 이전부터 시행해오던 정부시책이긴 했다. 다만 최홍희가 박정희 정권이랑 사이가 좋지 않다보니 이런 식의 주장도 생긴 것으로 보인다. 1972년, 최홍희는 자신이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며 [[망명]] 신청을 허가받은 [[캐나다]]로 망명을 간다. 국제태권도연맹(ITF)의 거점도 캐나다 [[토론토]]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후 최홍희의 ITF는 [[북미]]에서 인기를 끌다, 1980년대 들어 [[북한]]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이후엔 북한을 비롯한 중국, 소련, 동유럽 등 공산권 국가에 태권도를 중점적으로 보급하였다. 스위스도 90년대까진 ITF가 주류였다는거 보면 서유럽에도 보급한 모양. 그러나 이런 북한과의 교류는 30년 동안 그의 최측근으로 지내왔던 남태희를 비롯한 상당수 사범들이 그를 떠나는 ITF 분열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다만 반론측에선 최홍희가 북한과 일본에 태권도를 보급한 것으로 인해 사범들이 돌아섰다는 것은 왜곡된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몇몇의 한국인 사범들은 최홍희와 태권도에 대한 생각이 서로 맞지 않아 그의 곁을 떠난 것이지 그의 태권도 보급 활동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 최홍희는 망명 후에도 [[사인웨이브]]처럼 자신만의 독자적인 이론으로 태권도를 개량시켜 자신의 아호(雅號)인 창헌을 따서 '창헌류'라고 부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