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권도/역사 (문단 편집) ==== 청도관 ==== 5대관 중 최초로 설립된 도장으로 알려진 곳이다.[* 노병직은 자신이 이원국에 앞서 1944년 3월 개성에서 송무관을 개관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당시 동아일보 기사 등에 따르면 1946~7년에 정식으로 개관한 것으로 보인다. 오래 전 일이고 기록이 미비하여 현재 사실 관계를 명확히 확인하기엔 한계가 있다. --1944년에 수련한 양반 없는가--] 태권도의 형성과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도장이다. 이원국은 19세인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원국은 도쿄 [[주오대학|중앙대학]] 법학과에 다니면서 1929년부터 10년간 일본 가라테의 본산 쇼토칸(松濤館, 송도관)에서 근대 공수도의 창시자 후나코시 기친(船越義珍, 1868~1957)에게 가라테를 배웠다.[* 청도관의 물결 도(濤) 자도 송도관의 도 자에서 따왔다.] 1936년에는 훗날 송무관 창설자인 노병직도 쇼토칸에 들어와 이원국과 함께 수련했다.[* 다만 노병직은 이원국이 자기보다 나이는 많지만 송도관에 늦게 입관했다며 후배라고 주장했다. 보면 둘은 애증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1944년 9월 [[이원국]](1907~2003)이 서대문 옥천동 영신학교 강당을 빌려 개관했다. 개관 당시 이름은 '당수도 청도관(靑濤館)'이었다. '젊은 청년의 꿈과 기개가 파도처럼 퍼져나가라'라는 뜻에서 청도관이라 지었다고 한다. 이원국은 이후 자신의 [[명함]]에 '''한국태권도 창시주, 총재 이원국'''이라고 새기고 다니기도 했다. 이원국은 일단 개관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말기로 가면서 일본 제국 상황이 어려워지자 일단 문을 닫았다가 해방 후 종로구 견지동에 위치한 예배당인 [[시천교|시천교당]](侍天敎堂)에서 다시 재개관했다.[* 일반적으로 이원국의 청도관을 최초의 도장으로 보지만 일부 기록에서는 황기의 무덕관을 최초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이원국이 이렇듯 잠시 폐관했다 해방 후 다시 재개관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자신의 고향인 안국동으로 도장을 옮겼다. 이원국은 한국전쟁 당시 일본으로 갔는데, 이에 대해선 여러 말이 나온다.[* 이원국 본인은 당시 5천여명에 달하는 청도관 제자들을 자유당에 입당시키라는 이승만 지시를 거절해 대통령 암살미수 혐의를 받고 고문을 당하다 지인이던 육군 중장이 보증서를 내 겨우 풀려나 이후 피난민 틈에 끼어 부산에 가 일본으로 밀항했다고 주장했고, 노병직은 이원국이 서울이 점령당했던 당시 인민군에 붙잡혀 청도관원들과 한동안 부역한 사실이 서울 재점령 후 들통이 나 고된 문초를 받던 중 당시 이기권 선생의 도움으로 1.4 후퇴 직전에 간신히 풀려나 일본으로 도피했다고 주장했다. 둘 다 사실이라고 전제한다면, 큰 맥락은 한국전쟁 당시 이원국을 비롯한 청도관원들이 남북 양쪽에서 고초를 겪다 지인의 도움으로 해외로 도피한 셈이 된다.] 하여튼 일본에 체류하면서도 손덕성, 엄운규 등 제자들과 교류하던 이원국은 제자들의 성화에 종종 방한하기도 했지만, 1960년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이후부턴 사실상 국내 태권도계와 연이 끊어지게 된다. 1960년대 후반 태권도교범(진수당)을 출간하기도 했다. 청도관은 9대관 중 무덕관에 이어 가장 많은 수련자를 배출했으며, 한국 태권도계 원로급들을 다수 배출해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발차기 위주의 수련과 태권도란 명칭을 선제적으로 쓴 민간도장이기도 하다. 청도관에서 정도관(正道館), 오도관(吾道館) 그리고 국무관(國武館), 청룡관(靑龍館) 등이 분리되었다. 이원국은 어렸을 적에 [[택견]]을 배웠고 그것을 가라테에 접목시켰다고 주장한다. 이원국은 택견 수련 경력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를 제시한 적이 없기에 이를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옛날에 택견이 지금처럼 무슨 가르치는 학원 같은 게 있어 등록하고 다니다가 나중에 명부를 살펴보면 수강 여부를 바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와 같은 물증을 제시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예컨대 옛날 사람들이 어렸을 적 씨름 배웠다고 무슨 증명서같은걸 받는 시절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원국은 후술하는 황기와 같이 특별히 전통 무술의 복원을 추구한 인물도 아니었기에, 택견 수련 경험을 허위로 말하고 다닌다고 해서 딱히 실익이 있지도 않았다. 진짜 문제는 "접목시켰다"는 말이 무색하게, 태권도에 택견 기술이 유입된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타 내용은 아래의 'WT의 역사왜곡' 문단을 참고할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