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권도/역사 (문단 편집) ==== 송무관 ==== 노병직이 [[개성시]] 자남동 관덕정에서 개관했다. 개관 당시 이름은 '공수도 송무관(松武館)'이었다. 이후 명칭을 ‘당수도 송무관’으로 바꾸었다. 송무관은 처음 개성에서 개관했기 때문인지 5대관 중에서 세가 가장 약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개성이 북한에 편입되자 서울과 인천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노병직은 1936년 3월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쇼토칸에서 1929년부터 수련하던 이원국과 함께 근대 공수도의 창시자 후나코시 기친에게 [[가라테]]를 배웠다. 그러다 1944년 2월 고향인 [[개성시|개성]]으로 돌아온 노병직은 취미 삼아 가라테를 가르치다가 마침내 송무관을 열었다. 송무관이 열린 시기에 대해선 왈가왈부가 있는데, 현재 대한태권도협회 등에 따르면 송도관의 정식 개관은 1946년 5월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노병직 본인은 이원국의 청도관보다 앞선 1944년 3월 11일 개관했으며 송도관이 국내 최초의 당수도 관이라고 말하고 있다. 노병직에 따르면 관할청에 허가원을 제출하여 3월 20일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점차 치열해짐에 따라 일제의 법은 한국인 5인 이상이 집합을 하게 되면 반드시 경찰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되는 삼엄한 시기였다. 그러나 일본 가라테를 가르치겠다고 하자 관할 경찰 당국은 반색하며 허가해 주었다고 한다.] 정확하게는 1944년 3월에 창설했지만 전쟁통에 교습을 중단했다가[* 본인의 진술에 따르면 교습 시간은 매일 아침 6시부터 2시간이었다고 하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식 도장이라고 보긴 좀 애매하긴 하다.] 1946년 5월에 재발족했다고 주장한다.[* 이원국은 이때 개관 축하차 개성에 찾아왔고 축하 의미로 송무관이란 이름도 자신이 지어줬다고 주장했으나, 노병직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반대로 자신이 한국전쟁 이후 청도관 재건에 많은 도움을 줬다고 주장했는데, 청도관 3대 관장을 지낸 엄운규는 사실과 다르다며 노병직의 주장을 일축했다.] 그러나 <동아일보> 1948년 11월 9일자에는 창립 1주년 창립대회를 송도대강당에서 개최한다고 되어 있어 대외적인 송무관의 공식적인 개관은 1947년 11월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론 청도관의 도(濤) 자가 송도관의 도(濤) 자를 따온 것처럼, 송무관의 송(松) 자는 송도관(쇼토칸)의 송(松) 자를 따온 것인데, 노병직이 송 자를 먼저 선점했다는 점에서 청도관보다 먼저 개관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애초에 이름 가지고 선후관계를 따지는 것부터가 논리가 빈약한 주장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물증이 없다보니 지금 와서는 구체적으로 검증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 노병직은 5대관을 개관한 1세대 태권도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대한태권도협회 창립 이후까지 활약했다. 1966년에는 1년여 간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직을 맡았고, 60년대 후반엔 ITF 부총재도 지냈다. 다만 해외 인사들을 상대하는데 자신이 없었는지 일종의 대인기피증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 중반 미국 미네소타주로 이민을 간 노병직은 그곳에서 타계했다. 송무관 2대 관장인 그의 아들 노희상은 [[합기도]]와 북부 [[소림]] [[무술]]도 배웠다고 한다.[[http://biz.heraldcorp.com/view.php?ud=20150105000034|#]][[https://mookas.com/news/1460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