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극기 (문단 편집) ==== 근현대의 태극기 ====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한국 최후의 왕조 [[대한제국]]이 멸망하게 되자 대한제국의 국기였던 태극기도 사용이 금지된다. [[일제강점기]] 시기, 태극기는 곧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1919년 [[3.1 운동]]에서도 전국적으로 휘날렸다. 한국을 강제 병탄한 [[일본 제국|일제]]는 태극기를 '[[불령선인]]'의 상징으로 보아 제조·소지를 금하였다. 당시 태극기는 소용돌이치는 중앙의 태극과 대각선의 [[팔괘]]라는 기본 개념 외에는 고정된 개념이 없었기에 3.1 운동 시기 휘날린 태극기의 도안도, 의병 전쟁 시기 사용된 태극기의 도안도, 임시정부가 사용한 태극기의 도안은 모두 달랐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봉오동전투 독립군기.png|width=100%]]}}}|| ||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당시 독립군이 사용한 태극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한국독립군 진군기.svg|width=100%]]}}}|| || 독립군 진군기 || 1920년대 [[독립군(한국)|독립군]]들이 사용하던 태극기를 바탕으로 한 군기인 진군기. 태극기의 옆과 아래에 황색, 적색, 녹색 천을 덧대어서 군기로 사용하였다. 그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은 [[청산리 전투]] 같은 무장독립투쟁의 최전선에서도 태극기를 휘날렸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백초월 스님 태극기.jpg|width=100%]]}}} || || [[일제강점기]] 당시 [[백초월|구국 백초월 스님]]이 [[일장기]] 위에 덧대고 그린 태극기.[* [[2009년]], [[진관사]] 칠성각에서 보수공사를 하였을 때 칠성각의 벽을 뜯었는데 벽면에서 한 보따리가 나오게 된다. 그래서 보따리를 열었더니 보따리 안에 [[독립신문|<獨立新聞(독립신문)>]], <경고문>, [[신채호|단재 신채호 선생]]의 <新大韓(신대한)>과 함께 이 태극기도 같이 들어있었다. 의미는 ''' '일본의 제국주의에 독립정신을 새겨 넣는다.' '''로, 현재 [[진관사]]에서 보관 중이다.][br][[https://youtu.be/IoOnXZlRWmE|관련 영상]] || 대한민국 탄생의 시작점이 된 [[3.1 운동]]에서 탑골공원에 모인 시민을 비롯한 모든 참가자들이 민족의 공통된 상징으로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태극기를 국기로 채택했으며, 일제로부터 해방된 [[8.15 광복]]이 이루어지자 사람들은 태극기를 들고 감격을 표출했다. 어디서 태극기가 났는가 하면 위의 백초월 스님 태극기처럼 불쏘시개로 전락한 일장기 위에 덧칠을 해서 태극기로 만든 것이다. 당연히 파란 물감을 구하기 힘드니 대강 먹칠을 해서 빨간색과 검은색의 태극기가 휘날렸다. 괘 역시 대한제국 시절의 제도를 기억하는 서울에서는 정확히 사괘를 그렸지만 중장년층 이샹 세대 위주로 그냥 태극기라는게 있었다 정도만 기억하는 지방에서는 지역에 따라 팔괘태극기나 무괘태극기를 그리기도 했다. 한 동네 안에서도 태극기 형태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어 그냥 팔괘태극기와 사괘태극기를 둘 다 그리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대한제국 정부가 태극기의 형태를 법적으로 확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제 강점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광복 당시 태극기 문양의 정확성에 대한 담론은 의미가 없다. [[1948년]] [[7월 1일]] [[제헌 국회]]는 대한민국 국기로 태극기를 채택하였다(재석 188, 찬성 139, 반대 4). 다만 대한민국 국기를 태극기로 한다는 조항을 헌법 제2조에 넣을지 제4조 후단에 넣을지 설왕설래하다 결의만 하되 헌법에는 넣지 않기로 했다.[* 제헌국회 제1회 제22차 국회본회의 회의록 10~12p] 이 결정에는 [[조헌영]] 의원([[한국민주당]])의 주장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중앙청]]에 걸려 있는 태극기도 정확한 국기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태극기를 국기로 결정했을 뿐, 태극기가 구체적으로 어떤 도안인지는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확정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1949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은 총무처장에게 국기 도안을 확정지을 것을 지시한다.[[http://theme.archives.go.kr/next/symbolKorea/archivesDetail.do?flag=1&evntId=0049286497&page=1|대한민국 국기제정에 관한 건]] 그렇게 하여 여러 유력 인사들을 불러 김일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검토 끝에 최종적으로 후보가 된 것은 총 4가지였다. [[http://www.xn--3i0b3dy91d7fe52qz6h.kr/history/main.php?D1=history&D2=history03_03|#]] 1949년 2월 7일, 제1차 전체 회의에서 확정된 것은 당시 정부의 주요인사들이 망라된 '우리 국기 보양회'[* 이승만 대통령이 명예 총재로 있었고 [[고문]]으로 [[이시영(정치인)|이시영]]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 [[신익희]] [[대한민국 국회의장|국회의장]], [[안호상]] 문교부장관이 있었다. 참고로 위원장 김일수는 여기 회장이기도 했다.]가 제안한 태극기였다. 그런데 2월 28일, 2차 전체 회의에서 [[최남선]][* 위원은 아니었다. 반민특위에 소환된 사람이 국기 정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모양새가 이상하니까]과 법조계 인사들은 독립문 태극기를 5번째 후보로 제출하면서 독립문 태극기야말로 진정한 국기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갑론을박 끝에 다시 독립문 안으로 번복되어서 발표되었다. 하지만 이후 열린 제3차 전체 회의(3월 25일)에서 독립문 태극기의 4괘가 역리에 맞지 않다는 주장이 나와 다시 '우리국기 보양회' 안을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투표 결과는 찬성 28[* [[안재홍]], [[이병도]], [[정인보]], [[오세창]], [[이병기(국문학자)|이병기]], [[이재학(1904)|이재학]], [[고희동]], 김일수 등], 반대 11[* [[최현배]], [[손진태]] 외 2인은 구황실 소장안을 지지했고 이정혁 외 4인은 독립문 안을 지지했다.], 기권 1(이병렬)[* 문교부 편부과정이었던 [[이봉수]]는 참여했는데 투표 결과가 전해지지 않는다.]였다. 광복과 함께 새로 국기를 만들자는 주장을 한 인사(노응도[* 경기도 학무국장], 권혁채[* 우국노인회])도 있었으나 '''사상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바로 배척되었다. 이 회의 결과를 토대로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고시가 공포되었다. 이때 양음의 배색을 단순히 빨강색(진홍색)과 파랑색(아청색)으로 규정했는데 90년대 배색 논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CIE 1931이나 Munsell 색체계는 이 당시에도 있었지만, 색깔까지 구체적으로 표준화한다는 개념이 없었던 듯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