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자 (문단 편집) === 왕세자 === [include(틀:다른 뜻1, from=세자, other1=인터넷 방송인, rd1=세자(인터넷 방송인))] [[王]][[世]][[子]] [[명나라]], [[청나라]] 작위로서의 왕작(보통 [[황족]]), 주변 [[제후국]] [[군주]]로서의 [[왕]]의 뒤를 이을 [[왕자]]. 차기 왕위(王位) 계승자. [[황제]]의 자손인 친왕의 자식도 세자(친왕세자)라는 말을 썼다.[* 황제-친왕-세자 이며 [[일본]]의 경우에는 천황-친왕(父)-친왕(子)으로 이어진다. [[조선]]은 국왕-대군-군이다. [[조선]]의 경우,친왕급 예우를 받았지만 [[중국]]의 왕급 귀족들과 조선왕이 사용하는 경칭이나 예법이 상당히 다르다. 현실적으로 조선왕은 작위보다는 군주로서의 성격이 강해서 예법에 의하면 황제만이 사용할수 있는 용어들을 많이 혼용하거나, 따로 조선만의 용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예법에서 규정한 제후국의 그것들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한편, 현대 한국에서는 사극 이외에는 유럽이나 중동의 차기 왕위계승자를 표현할때 번역어로 주로 사용한다. 중국에서는 외국의 차기왕위 계승자를 번역할때는 황태자나 왕세자보다는 황저(皇儲), 왕저(王儲)라고 표현하는편이다. 일본에서는 보통 황태자 간혹 왕태자를 사용하는 편이며, 왕은 아니지만, 룩셈부르크의 차기 공위를 계승할 공자에게는 공세자라는 표현을 쓰며, 경칭은 전하를 쓴다.[* 중국과 일본에는 [[저하]]라는 표현이 없다. 저하는 한국만의 고유 호칭이다.] 그러면서 또, [[룩셈부르크]] 대공에게도 경칭을 전하라고 표기하고 있다. 배우자는 대공비. 세자 칭호는 4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칠지도]], 5세기 초반에 제작된 [[광개토대왕릉비|광개토왕비문]]에 세자 또 삼국사기 고국원왕 4년에서 그 칭호가 보이나 문제점은 한국의 [[삼국사기]][* 고구려의 경우에 삼국사기 고국원왕10년 왕세자 칭호와 영류왕 치세기 그의 태자 [[고환권]]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왕위 계승자에 대한 호칭인지는 불명. 정론은 고국원왕의 계승자 소수림왕은 340년 즈음에 태어났을 거라고 추정하기 때문에 시기상 계승자인 소수림왕이 아닐 경우가 크다. 그렇기에 원 (元)태자는 요절 했을 가능성이 있다. 마찬가지로 영류왕의 경우도 그의 후계자가 보장왕 이었던 것을 보면 환권이라는 태자는 요절 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보장왕은 영류왕의 아들이 아닌 조카다. 환권은 중국측에서는 태자라고 기록 했지만 삼국사기에서는 세자라고 기록 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전부 왕위에 오르기전에 요절 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아선 당대의 중국왕조와 고구려는 태자/세자라는 용례를 특별히 신경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삼국유사]]나 일본의 [[일본서기]], [[속일본기]] 등에는 백제에서 세자(왕세자) 칭호가 사용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일본 역사학자 모리 기미유키, 하마다 고사쿠의 주장으론 당시 백제가 [[동진]]과 책봉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본래 백제에서 사용하던 태자 칭호를 세자로 고쳤을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가 있는 것을 보아 해당 기록들이 백제에서 세자 칭호를 사용한 근거가 되지는 않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잠시만 생각해도 개소리라는 것을 알수 있다. 물론 백제의 사례가 아니라 고구려의 사례이지만 광개토왕릉비를 보면, 영락(永樂) 원년, 영락(永樂) 6년 영락(永樂) 10년 꼬박꼬박 고구려의 독자적인 연호를 적고 있지만, 광개토왕릉비의 다른 면에는 추모왕의 세자 유리왕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므로 당대에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다고 태자를 세자라고 칭하며 조공책봉 질서를 기본으로 한다는 가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일본 학계에서는 조공책봉과 연호를 연계시켜, 칠지도에 있는 원문에 사용된 세자라는 칭호를 이용하여 중국 연호라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 아예 [[동진]]에서 제조된 도검이라고 주장하는데에서 하마다 고사쿠, 모리 기미유키 등을 위시한 일본사학계에의 세자 칭호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 있다.]하술 하겠지만, 이러한 이유로 당시 삼국시대의 국가들은 세자,태자를 혼용 했다고 볼 수 있으며, 조공책봉 관계와는 얽매이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 광개토왕비문의 세자 칭호를 근거로 세자 칭호가 사용되거나 태자와 세자가 혼용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저 세자 칭호가 5세기 당대에 사용된 용어라 장담할 수 없고 (왜냐면 고구려는 국초부터 [[유기(역사책)|유기]](留記)라는 역사서를 편찬했기 때문에 거기에 쓰여진 고구려 초기 기록대로 세자라고 호칭했을 가능성이 있다) 애당초 저 기록도 광개토태왕비문이 국내 사람만이 아닌 중국이나 외국 사신들도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책봉 관계를 고려해서 일부러 세자로 고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책봉관계에 그렇게 신경 썼기 때문에 자국의 태자를 세자라고 칭하면서 릉비에 떡하니 독자연호를 썼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넌센스다. 그것도 까마득한 옛날 옛적 추모왕의 아들 유리왕을 세자라고 칭하면서 장수왕 3년에 당대에 아주 인접한 시점에 사망한 부왕의 연호를 기록 했다고 하는 점에서, 오히려 중국의 눈치를 봤다면 반대로 연호를 중국 연호를 사용하고 까마득한 옛날의 유리왕을 태자라고 칭했거나 아니면 둘다 세자와 중국연호를 사용 했을 것이다. 게다가 릉비에는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이 극치에 달하고 신라와 백제를 훈도,교화 해야하는 대상으로 보며, 부여 백제 신라에게 조공을 받는 점을 강조한 것을 보면 [[유기(역사책)|유기]](留記)에 세자라고 적혀 있다고 고지고대로 받아 적었다는 점 자체도 납득 할수 없다. 릉비의 성격상 참조된 원문이 세자라고 적혀 있어도 태자라고 고쳐 기록 했을 가능성이 큰데 세자라고 기록 했는 것을 보면 세자,태자 칭호 자체를 별로 신경을 안썼거나 혼용 되었다는 방증이다. 게다가 일본서기에 기록된 세자(후에 양원왕이 되는 인물)를 둘러싸고 벌어진 내전을 전하는 기사에서도 태자를 세자로 부르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 측에서는 태자와 세자를 혼용 했을 가능성은 있어보인다. >是歲, 高麗大亂. 凡鬪死者二千餘. ,,百濟本記云, 高麗, 以正月丙午, 立中夫人子爲王. 年八歲. 狛王有三夫人. 正夫人無子. 中夫人生世子. 其舅氏麁群也. 小夫人生子. 其舅氏細群也. 及狛王疾篤, 細群·麁群, 各欲立其夫人之子. 故細群死者, 二千餘人也.,, >_이 해에 고구려에 대란이 있었다.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백제본기』에서 “고구려에서 정월 병오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 주를 왕으로 세웠다. 나이가 8살이었다. 코마 왕(狛王)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다. 정부인(正夫人)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중부인(中夫人)이 세자(世子)를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추군(麁群)이었다.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세군(細群)이었다. 코마 왕이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부인이 낳은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세군 측에서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 ---- > 일본서기, 546년 이것은 당대에 작성된 백제본기의 내용을 그대로 차용했기 때문에 고구려는 세자/태자를 조공-책봉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혼용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5세기 중반에 제작된 [[충주 고구려비]]에는 왕의 아들을 태자라 호칭하고 있는데 여기서 태자 공은 [[고조다]]([[문자명왕]]의 아버지)가 아니라 장수왕의 다른 아들로 보이기 때문에 왕의 적장자가 아닌 다른 아들에게 태자 칭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태자에는 보통 왕위 계승자를 지칭하는 용례와 왕의 장자를 지칭하는 용례가 있기 때문이다. 춘추필법에 의거해 충주 고구려비에 기록된 태자는 요절한 장수왕의 장자로 볼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계의 중론은 중원 고구려비의 태자는 고조다를 칭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원래 [[고려]] 초기에는 정윤이라는 독자적인 태자 칭호를 쓰다가 중기에 태자로 바뀌었는데, [[고려]] 후기 [[원나라]] 간섭기에 [[왕세자]]로 격하되었다.[* 이 때 모든 칭호를 한 단계 낮게 바꿨다. 그렇기에 후(后)는 비(妃)로, 비는 빈(嬪)으로, 태(太)는 대(大)나 세(世)로 교체했다. 즉, 왕후는 왕비, 태왕태후는 대왕대비, 태자는 세자라 했다. 대군, 군 등의 [[작위]]들 역시 [[공]](公), [[후]](侯) 등의 작위를 사용할 수 없으니 격을 낮추어 만든 것이다.] 그 칭호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가 [[고종(대한제국)|고종]] 32년(1895) 왕태자로 복귀되었고 다시 [[광무]] 원년(1897)에 황태자로 고쳤다가 [[대한제국]]이 [[경술국치]]로 멸망하면서 황제위를 잃고 [[이왕]]으로 격하되어 황태자에 대한 칭호도 이왕세자로 격하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