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조(고려) (문단 편집) == [[태조(고려)/생애|생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태조(고려)/생애)] 877년 송악군[* 오늘날 [[개성]]]에서 고구려 계통의 [[패서]] [[호족]] 가운데 하나로서 예성강 유역의 해상 무역 활동으로 성장했던 [[왕륭]]의 아들로 태어났다.[* 실제로 [[개성]]이나 [[평양]] 등 과거 낙랑군에 속했던 이 지역은 고구려 때도 왕씨가 유력 가문으로 세거하던 곳으로, [[왕모중]]▪︎[[왕산악]]▪︎[[왕사례]]▪︎[[왕고덕]] 등 확인되는 왕씨 성의 유력한 고구려인들이 많다. 이외에도 왕건은 (같은 고구려 유민으로서의) 혈연적 친연성을 근거로 발해를 친척 국가로 인식했으며 실제로 외교적 수사에도 이를 활용하였다. 무엇보다 발해에서 확인되는 귀족 성씨 가운데 대(大), 고(高), 양(楊), 장(張), 이(李) 말고도 왕(王)씨 또한 포함되어 있다.] 896년에 왕륭이 궁예에게 귀부했을 때 함께 들어오고 [[후고구려]] 즉 [[태봉]]을 세운 궁예의 장수로서 [[후백제]]의 해상 요충지였던 [[나주]]를 점령하고 나주 호족들을 모두 복속시켰다. 후백제는 이후 전략적으로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되었고, 태봉의 영토는 대폭 넓어졌으며, 왕건은 수많은 전장에서 눈부신 공로를 세웠다. [[궁예]]와 호형호제를 허락받았으며 913년, 37세의 나이에 2인자로서 [[시중]] 자리까지 오르는 등 궁예의 총애를 받았으나 918년 궁예가 폭정으로 인심을 잃자, 여러 장수들과 대신들이 왕건을 임금으로 추대한다. [[역성혁명]]으로 궁예를 축출하여 [[태봉]]을 멸망시키고 제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 [[고려]](高麗)를 건국하게 되며, [[연호]]를 천수(天授)로 정한다. 이듬해 철원에서 가문의 텃밭이었던 송악(개경)으로 천도했다. 조세율을 감면하고 흑창을 설치하거나 신라에 우호적 제스처를 취하는 등 취민유도(取民有度), 중폐비사(重幣卑辭)라는 키워드로 일컬어지는 유화 정책으로 민심을 얻으려 했으며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자웅을 계속 겨뤘고 견훤이 [[서라벌]]을 함락시키자 직접 신라를 지원하려 하다 [[공산 전투]]에서 대패, [[신숭겸]]의 희생으로 구사일생하기도 했으나, 고창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뒤 장남 [[견신검]]의 반란으로 쫓겨난 견훤이 고려로 귀순하고 신라에서는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자 통일 대업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936년 [[견훤]]과 함께 후삼국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 승리해 후백제를 병탄함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한다. 같은 해 예절에 대해 저술한 <정계> 1권과 백관을 대상으로 한 교훈서 <계백료서> 8편을 반포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신라는 경주 중심의 [[골품제]]를 유지하며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층을 동화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왕건은 신라의 골품제를 혁파하고 이들을 결속했다. 고구려 계승을 천명했기에 [[발해]] 멸망 후 내려온 [[발해유민]]들도 받아준다. 재위기간 [[불교]]와 [[유교]], [[풍수지리]] 등을 국시로 고루 숭상했고 지방 [[호족]]을 포섭하거나 견제하기 위한 정책을 폈으며 수도는 [[개경]]이었으나 고구려 수도였던 [[서경]](평양)을 중시하고 서쪽으로 안주에서 동쪽으로 영흥까지 약간의 북진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통일을 이룩한 지 7년 만인 943년 재위 25년 만에 [[훈요 10조]]를 남기고 신덕전에서 66세로 붕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