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조(고려) (문단 편집) === 능력 === 송악 호족 [[왕륭]]의 아들로서 당시 대당무역의 거점이었던 예성강 주변([[패서]])이 가문의 근거지였다. 따라서 [[장보고]]가 죽고 청해진이 폐쇄된 지 40여 년이 지나 농업 위주의 영지가 되어버린 백제 지역[* 장보고의 난 진압 후 851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의 인력들을 김제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 후로 [[능창|수달]], [[현춘]], [[순천 김씨]], [[순천 박씨]], [[낭주 최씨]], [[나주 오씨]], [[진도 김씨]], [[압해 정씨]] 가문 등 백제 지역에 기반한 해상세력은 많이 난립했으나 [[신라구]]였던 [[현춘]]을 제외하면 대외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던 대세력이 전무하다. 대체로 지역 수운, 사략질, 국내 사무역에나 종사하는 수준. 게다가 892년 전에 이미 [[견훤]]이 속했던 신라 방수군의 지속적인 해적 토벌과 894년 [[현춘]]의 규슈 침공 실패로 수달을 제외한 백제 지역 대규모 해상세력은 932년 [[상귀]], [[상애]]의 함대가 나오기까진 사서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이나 지정학적으로 외국과 직접 교역이 불가능한 영동/영남 지역의 호족들에 비해 상업적인 능력과 국제 정세 이해, 중국 문물 수용 및 정보력에 있어 우위에 있었다. 군사적으로는 특히 패서 호족이었던 만큼 [[수군]]을 잘 다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궁예가 직접 한찬 해군대장군으로 임명하여 [[후백제]]의 후방인 [[나주시|나주]] 지방을 상륙전으로 빼앗게 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나주를 빼앗긴 견훤은 그야말로 언제 뒤쪽을 가격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수십 년 동안 시달렸는데 궁예 휘하에서 젊은 나이에 [[시중]]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전공들 덕이었다. 반면 육전 지휘력은 다소 애매한데 초반에는 궁예 휘하의 무장으로서 한주, 충청, 패서 일대의 [[도적]]들을 토벌하고 사화진에서 후백제 군대를 격파하고, 호족 세력을 포섭하는 다수의 전공들을 세웠다. 그러나 대규모 [[육군]]을 지휘할 때는 가끔씩 약한 모습을 보인다. 쿠데타 직후 반기를 든 세력들이 많았다고는 하나 [[태봉]] 시절 확보했던 운주, 청주의 호족들을 쉽게 제압하지 못하고 일진일퇴의 공방 끝에 결국 해당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태봉 시절 궁예는 [[비뇌성 전투]] 이후 [[양길]]의 잔당으로 추정되는 [[신훤]], 청길을 흡수하며 충주, 청주를 확보했다. 또한 904년 공주장군 홍기가 투항했고, 906년 사화진 전투 기록으로 보아 충주 이남의 상주 일부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고려군 [[병력]]이 우세했던 925년 상주 [[조물성 전투]]에서는 두 왕들이 맞붙었다가 견훤이 친히 지휘하던 후백제군에 3부대 중 2부대가 털렸는데, 그 사이 청주 전선의 [[유금필]]이 연산진과 임존성에서 승리한 틈을 타 [[인질]]을 교환하며 화친하는데 그쳤다. 왕건이 친정에 나섰던 928년 삼년산성 전투에서도 패배하여 결국 통일 전까지 [[삼년산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공산 전투]]에서는 신속한 기동으로 서라벌을 함락해버린 견훤을 무리하게 추격하다 매복에 걸리는 바람에 [[신숭겸]], [[김락]] 등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죽을뻔했다. 다만, '고창 전투'와 그 이후의 결정적인 육전들에서는 확실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왕건의 진정한 장점은 명철한 결단력과 빠른 행동력, [[상인]] 가문 특유의 [[외교]]력과 궁극의 화친 능력을 들 수 있다. 그의 결단력과 행동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관심법]]을 썼다며 역모를 자백하라 억지 부리는 궁예 앞에서 쿨하게 꾸미지도 않았던 반란을 모의했노라고 인정하는 모습, 말년의 궁예가 폭정을 휘두르자 부하들에 의해 [[역성혁명]]의 주역으로 추대되어 실행에 옮기는 모습, [[태봉]]을 멸하고 고려를 세운 후 항거하던 궁예의 봉신들을 화전양면책으로 재빨리 수습한 데서 그 능력을 엿볼 수 있다.[* [[김순식]], [[이흔암]], [[환선길]], [[임춘길]], [[공직(고려)|공직]] 등 왕건의 쿠데타 직후 이에 저항한 호족 세력들은 적지 않았다. 왕건 가문의 영지인 패서와 자신이 제압한 경기 일대를 제외한 동남쪽 다수의 호족들이 왕건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왕건은 환선길, 이흔암 등의 반란은 무력으로 신속히 제압하고, 김순식의 아버지 [[허월]]을 포섭하는 유화적 외교 전략으로 명주를 복속시키는데 성공한다. 또한 청주에서 반란의 기미를 포착하고 [[홍유]]와 [[유금필]]을 진천에 주둔시켜 청주 호족들을 견제한다. 반면 매곡성([[충청북도]] [[보은군]])을 통째로 [[후백제]]에 갖다 바치며 귀순한 매곡성주 공직은 후백제가 고창전투의 대패로 국력이 크게 위축되자, 932년 다시금 왕건에게 귀순하는데, 왕건은 자신을 배신한 호족에게 얹잖은 티를 내기는커녕 명마, 비단과 함께 백성군([[경기도]] [[안성시]])을 영지로 하사한다.] 후삼국 내의 호족들 외에 [[발해]]의 [[대광현]]과 [[발해유민]]들, 그리고 일생일대의 라이벌이었던 [[후백제]]의 [[견훤]]까지 포용하는 포용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협상가로서 호족들을 포섭하는 외교력과 친화력도 탁월하다. 쿠데타 직후 친 궁예 세력과의 싸움으로 인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를 회유하여 [[상주시|상주]] 지방을 획득했고, 궁예를 따르다가 왕건의 쿠데타 직후 독립을 선언했던 [[강릉시|명주]]의 신라 왕족 김순식도 4년 뒤 왕건에게 복속했다. 또한 견훤이 [[경주시|서라벌]] 정벌 후 직접 옹립한 [[경순왕]] 김부도 고려에 귀순시켜 영동/영남 지방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획득한다. [[공산 전투]] 패배 이후 후백제보다 군사적, 정치적 입지가 불리해졌던 상황에서도 '삼태사'라 불리운 토착 호족 세력(김선평, 권행, 장길)을 끌어들여 한창 수세에 몰려 있던 전세를 역전시켜 [[고창 전투]]에서 대승했다. 놀라운 수준의 포용력으로 호족 세력을 계속 끌어모으니 결국 견훤은 궁지에 몰렸고, 마침내는 최대의 적이었던 견훤마저 아군으로 삼아 외교적으로 후백제의 호족 세력들을 동요시켜 후삼국을 [[통일]]한다. 이런 결과는 생전에 호족들, 심지어는 가족들 간에도 화애롭지 못하여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견훤과 비교하자면 서초패왕 [[항우]]와 [[고제(전한)|유방]]과 같은 모습이다. 물론 사료에서는 승리자를 예찬하고자 왕건의 이런 능력이 '천명', '인덕' 같은 단어로 포장되었으나 이러한 단어들만으로는 전란의 시대, 배반과 이합집산을 밥 먹듯이 하며 신라 [[왕실]]의 권위에도 반항하던 수많은 호족 세력들이 왜 왕건에게 포섭되었는가를 설명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때문에 상인 가문의 [[후계자]]로서 왕건은 서로 간의 이권이 첨예하게 얽혀있던 지역 호족들의 각기 다른 목적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에 걸맞는 현실적인 대안(부/명예/권력)을 제시할 수 있는 정보력과 외교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강원도 일대에서 잘 나가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고작 [[양길]] 휘하 일개 무장이던 궁예에게서 야심을 읽고 본거지인 송악을 통째로 바쳐 송악을 태봉의 첫 수도로 만들어 낸 왕륭이나 그렇게 얻어낸 궁예의 무력을 이용하여 이전에는 압도하지 못했던 패서 일대 호족을 단번에 태봉으로 복속시킨 왕건의 행동을 보면 당시 송악 왕씨 가문의 정보력과 교섭력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궁예 휘하에서 자기 세력을 확보해나가는 왕건의 행보와 쿠데타 이후, 전국구 [[네임드]] 호족에 대한 포섭 과정을 보면 왕건 스스로도 대세를 읽고 상대가 원하는 바를 제시할 수 있는 상인 가문의 기질을 상당 부분 섭렵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http://gonggam.korea.kr/newsView.do;JSESSIONID_WEEKLY=NdzTbKHLW1Q7GjqnJ7cJ2H0jjHQkJwyFvq9NnjyQWwnhJ82vMBQM!1086463106!214405626?newsId=01I2hlKb0DGJM000§Id=gg_sec_62|정훈이 만화: 《왕건, 통일의 기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