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조(송) (문단 편집) == 이야깃거리 == * 조광윤이 세상을 떠날 때 돌에 유훈을 새겼고, 새 황제가 즉위를 하였을 때 반드시 이를 보고 지키도록 하였다.[* 새로 즉위한 송조의 황제는 입이 무겁고 글을 모르는 내시 한 명과 이 돌 앞으로 가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읽었다고 한다.] 이를 돌에 새겨 남긴 유훈이라 하여 '석각유훈(石刻遺訓)'이라 하는데, 존재 자체가 송 황실 최고의 극비였던 까닭에 아무리 총애받는 신하라고 해도 그 존재를 몰랐다. 결국 석각유훈은 [[금나라]]가 [[정강의 변|수도 변경(개봉)을 점령]]한 후에야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시씨의 후손은 죄가 있어도 형을 가하지 말고, 역모의 죄를 지었다 해도 옥중에서 자진하게 해주고, 저잣거리에서 공개 처형하지 말 것. 그리고 지속(支屬)에게 연좌시키지 말 것. >2. 사대부와 상소하는 사람을 죽이지 말 것. >3. 자손 중에서 이를 어기는 자는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다. 역사 소설가 [[진순신]]은 <18사략> 등에서 석각유훈을 비롯한 송 태조의 통치 방식을 높게 평가하면서 중국 사상 최고의 군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광윤의 보호를 받던 시씨들은 [[애산 전투]]에 참여해 송나라의 최후를 같이 한다. * ||[[파일:external/www.huaxia.com/383539.jpg]]|| ||송태조축국도(宋太祖蹴鞠圖). || 조광윤은 [[축국]] 실력이 상당했다고 한다. 이 그림에는 참모인 조보, 뒷날 태종이 되는 동생 조광의도 그려져 있다. 공을 가지고 노는 사람이 태조 조광윤이고, 뒷쪽 가운데쯤에 태조와 비슷하게 생긴 인물이 동생인 태종 조광의. * ||[[파일:external/djyimg.com/808261901201974.jpg|width=400]]|| 무장의 모습을 그린 현대의 작품. 조광윤은 무예가 매우 뛰어난 용장으로, 특히 창술과 봉술에 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후주와 북한이 대회전을 벌인 [[고평 전투]]에서 우익을 맡은 번애능을 비롯한 여러 장수가 도주하는 바람에 큰 위기를 맞았으나. 시세종의 숙위장령이던 조광윤이 친위대를 이끌고 돌격해 적의 전열을 무너뜨려 승리한 적이 있다.] 전쟁터에서는 쇠로 만들어진 봉을 휘둘렀는데, 전투 중에 봉이 부러져 쇠사슬로 연결했는데 그 위력이 대단하여 [[편곤]]의 시초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듯 곤술(棍術)에 뛰어나서 태조곤법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무림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을 정도로 달인이었다. [[편곤]]의 기원을 따지다 보면 이 사람의 이름이 꼭 튀어나온다. 다만 실제로는 조광윤이 아니라 서융족의 무기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송(宋) 태조(太祖) 삼십이세장권(三十二勢長拳) 즉 [[장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축국도 잘하고 봉술도 권법도 마스터인 걸 보니 꿈의 무술고수황제인 듯.[* 조광윤은 중국에 꽤 많은 설화를 남겼을 정도로 젊은 시절에 구직활동을 위해서 열심히 돌아다녔고 무예가 뛰어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많다. 이런 무인적 면모가 두드러지는 황제로 후일의 [[영락제]]가 있다.] * 선견지명도 있었는데 속자치통감 7권에 따르면 송나라의 수도로 [[뤄양시|낙양]]과 [[시안시|장안]], [[카이펑시|개봉]] 중에서 택일하려고 하였을 때, 조정 제신들은 모두 험준하지만 당 말 이래로 쇠퇴해진 낙양이나 장안 대신 조운이 편리한 5대 이래로의 도읍 개봉에 정도할 것을 지지하였고 송 태조는 처음에는 낙양, 나중에는 장안을 선택해 [[주나라]], [[한나라]]처럼 험한 지형에 의존해 용병을 하지 않으려 했으나 송태종 조광의가 조운을 통해 물자가 풍부한 [[카이펑시|개봉]]을 추천해 마지못해 이를 따르면서 동생의 말은 진실로 훌륭하지만 백년도 안 돼 천하 사람들의 힘이 고갈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즉 개봉은 수비할만한 곳이 없는 평야니 훗날 후손들에게 해가 될 것이라 탄식했던 것. 그리고 '''[[정강의 변|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 배주석병권의 일화에서 보듯 공신들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인격도 원만했으나, 공신들에 대한 비판에는 울컥하는 면모가 있었다. 뇌덕양이라는 신하가 공신 조보를 비판하자 화가 치민 조광윤은 '''"야 조보가 내 공신인 거 모르냐?"'''라면서 [[강냉이|도끼를 집어다 자루로 뇌덕양의 입을 후려쳐서 옥수수를 털어버렸다]]. 그리고 뇌덕양은 지방 관직으로 [[좌천]]. 뒷날 [[조선]]의 [[세조(조선)|세조]]는 경연 자리에서 이 일을 기록한 기사를 강독하게 되자 시독관 홍옹에게 "이 일화 어떤 것 같냐?"라고 질문을 던졌다. 홍옹은 "죄가 있으면 마땅히 관련 부서에서 처리할 일이지 송 태조처럼 신하의 이를 부러뜨린 건 잘못입니다"라고 상식적인 평가를 내렸으나, 정작 세조는 "무슨 소리! '''조광윤 그 양반 재위 20년간 과감히 결단한 것은 이것뿐이구만!'''"이라고 평가했다.[* 본인도 공신들을 아꼈고 성격도 무례했던지라 이 일화를 좋아했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108005_004|세조 실록, 세조 1년(1455년) 8월 5일]]] * 이 문서에서 계속 일컫는 도끼는 사실 사람 잡는 그 쇠도끼가 아니라 옥으로 만든 도끼 모양 장신구이다. 어찌나 좋아했는지 무슨 판사가 법봉 두들기듯이 들고 지냈다고. 비슷한 일화가 하나 더 있다. 송태조가 후원에서 활을 쏘며 시간을 보내는데 어느 관리가 들어와서 상소문을 올리겠다고 보고했다. 송 태조가 보니까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 내용 같아서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데 이게 뭐라고 지금 여기 와서 나한테 들이밀면서 내 시간을 허비하는가."라고 신하를 꾸짖었는데, 그 신하는 지지 않고 "죄송하지만 폐하께서 한가하게 노는 것보다는 중요한 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빡이 친 송 태조는 다시금 그 도끼로 신하를 쳐서 신하의 이가 두 개나 부러졌다. 입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태연히 상소문을 놓고 자기 이를 줍는 그 신하를 보고 "너 지금 그거 가지고 나한테 담아두는 거냐?"라고 물었는데, 그 신하는 "아닙니다. 그냥 가지고 나가서 사관한테 보이려고 그럽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사관에게 있던 일을 얘기해서 역사에 기록해놓겠다는 말이다.] 그 자리에서 송 태조는 신하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고 치료비까지 주었으며, 후일 자신이 어떠한 일을 하고 있더라도 항상 상소문을 올리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 이 사람에게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는 지역 음식이 있다. 조광윤이 야전에서 구르던 군인 시절 섬서성의 파오모(泡馍)라는 누룩 없이 딱딱하게 구운 밀가루 반죽 말랭이를 국물에 적신 것으로 끼니를 때운 것에서 유래한, 파오모를 잘게 뜯어 양념한 [[양고기]]국물에 넣고 끓여서 만드는 양러우파오모(羊肉泡饃)라는, [[시안(도시)|시안]] 지방에서 일상적으로 먹는 요리가 있다. * 태조 조광윤의 치세는 [[고려]] [[광종(고려)|광종]](949~975) [[경종(고려)|경종]](975~981)의 치세와 겹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