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조(조선)/생애 (문단 편집) === 무장 이성계의 세력 === [[파일:이성계 휘하 여진부족2.png]]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의 벼슬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였으며, 그 뒤를 이은 이성계의 벼슬은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겸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였다. 일단 금오위상장군은 고려군 2군6위 중 개경 방어를 담당하는 금오위의 수장으로 오늘날의 국군의 4성장군 7명에 해당되는 고려군 8대 상장군 중 하나인 최고위 중앙군직이고, 동북면상만호는 내무군인 순군만호부 소속으로서 동북면 방면의 수장이니, 대강 '4성장군 수도 방어군 총사령관 겸 내무군 동북관구 사령관' 정도 되겠다. 물론 이는 단지 상징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태종(조선)|태종]] 시기에 남아 있던 이성계 직할 사병인 '[[가별초]]'가 5백호에 달했다는 기록을 보면 상징적으로라도 이런 최고위 군직을 줄수밖에 없을 정도로 동북면의 상당한 토지와 인구를 '봉건 영주'처럼 지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가 원간섭시기가 되면서 사실상 중앙의 여러 조직들이 사실상 붕괴되었다. 이에 고려 후기에 조정은 사실상 원의 군대에 기생하며 살고 있는데, 공민왕이 각 지방의 토지와 사람들을 지배하던 토호들을 왕이 가지는 권위로써 복종시켜 국가체계를 다시 정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이 사망하면서 고려의 군사권은 소수의 근위부대 출신에 군원로 최영과 각 지방 토호들이 연합한 형태로 구성되었다. 이에 이성계는 동북면일대의 사병들을 기반으로 국가의 명령으로 배속된 토호의 사병들을 이끌고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개성시|개경]] 탈환에서 이성계가 동원한 [[사병]]은 '''2,000명'''이나 되었다는 점에서 그 만한 사병을 유지할 수 있는 막대한 경제적 기반과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성계의 사병 규모는 양적으로 상당한 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정예였는데, 이성계는 외적과 싸울 때도 아낌없이 자신의 사병을 동원했었으며 이들은 이성계의 화려한 전공을 뒷받침하는 정예병이었다. 그냥 정예 보병 정도도 아니라 이성계의 개인 사병 집단 대부분은 수천 명의 정예 기병이었다. 또한 이성계는 동북면 - 동만주 지역의 수많은 [[여진족]] 세력을 거느린 일대의 지배자였기 때문에 여차하면 전장에 이성계의 최대 전공 중 하나인 [[황산대첩]]에서처럼 여진족이 포함된 기병[* 태조실록 1권 총서 76번째 기사에는 황산대첩은 아니지만 여진족이 전투에 참가한 기록이 있다. 왜구와 전투에서 이미 승기를 잡아 승세가 아군 측으로 기울었는데, 여진족 군인이 왜구를 마구 죽이자, 이성계가 적이 불쌍하니 이제 그만 죽이고, 생포하라고 한 기록이다. 다만 보병인지 기병인지는 확실치 않다.]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이 이성계 휘하 무장들의 출신을 살펴보면 이성계가 적접 다스리던 고려인 농부, 평민들 뿐만 아니라 여진족, 몽골인들이 모두 잡다하게 섞인 다민족 혼성 부대였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런 정예 사병인 이성계 군단은 전투전에 대라(大螺)를 부는것이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는데 적들이 그 소리를 듣고 바로 이성계가 왔다는 걸 알고 두려워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 명성이 고려 내에서 매우 드높았다. [[http://pgr21.com/pb/pb.php?id=freedom&no=71275|자세한 내용은 이글을 참고하자]] 이성계의 정예 부대인 [[가별초]]는 조선 왕조 건국 이후 왕자들에게 분배되었다가, [[태종(조선)|태종]] 시기에 완전히 혁파되어 관군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이성계의 가산은 조선 왕실의 재산으로 편입되어 왕들의 [[비자금]]인 '''내탕금'''으로 사용되었다. [[정도전]] 등은 이 재산도 국고로 귀속돼야 한다고 했으나 [[태종(조선)|태종]]이 정도전을 제거한 후 이 가산은 왕의 개인 재산이라고 선포했다. 명목상으로 조선의 재산은 모두 왕의 재산이었으나 사실 세금 등을 왕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왕은 국고와는 별도로 개인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대통령 재산하고 국고하고 별개이듯) 즉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세금을 마음대로 쓰기는 부담스러웠다. 그러다가는 폭군으로 낙인 찍힌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나라를 대표하는 부자 화신이 죽은 뒤, 부정하게 모은 화신의 재산은 국고가 아닌 내탕금으로 귀속될 정도로 국고와 내탕금이 구분됐다. 물론 이때문에 청나라 황제 가경제는 비난받기도 했다.][* 백성에게 거두는 세금의 제한이 없으면 임금이 쓰는 것에 한정이 없으니, 세금은 시기에 따라 가감하며 정한 법 이외에는 더 거두지 못하게 하라. 세종실록 세종 28년] 반면 이 가산은 왕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개인 재산이나 마찬가지였다. 왕들은 내탕금을 사용하여 개인적으로 절을 짓거나 잔치 등을 여는데 활용하였으며, 흉년에 백성들을 구휼하거나 땅을 사들여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였다. 이성계가 왕이 되었을 때 [[함경도]] 땅의 3분의 1이 이성계의 개인 재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그래도 함경도의 대부분이 길주분지를 제외하면 경작이 불가능한 개마고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성계가 대한민국 전도에서 보이는 함주평야나 영흥평야를 통째로 가지고 있었던 거나 다름이 없었으니 가히 대재벌이 따로 없었다 하겠다. 이는 나중에 별도의 내시 기관인 '[[내수사]]'가 관리하였다. 내수사에서는 이 땅을 소작하거나, 소출로 이자 놀이를 해 재산을 늘렸는데 소작료와 이자가 시중에 비하여 낮았으며[* [[성종(조선)|성종]]이 이에 대해서 신하들에게 변명한 기록도 있다.]이 관료들의 수탈도 없었기에 백성들은 앞다투어 내수사에 소작을 하거나 돈을 빌리려 하였다. 또 그는 동만주 북방 [[여진족]]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후일의 청 태조인 [[누르하치]]의 6대조인 [[아이신기오로 먼터무]]도 이성계의 부하였을 정도. 당시 그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http://www.pgr21.com/pb/pb.php?id=freedom&no=66984|이글을 참고]]하자. 단, 중간에 나오는 여진족 부족 지도는 링크된 본문에서도 조금 언급하지만 모두 이성계에게 완전히 복종한 부족들은 아니며, 지도에 나타난 지역이 모두 이성계의 땅인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영향력이 크든 작든 일단 미치기는 하는 지역을 뭉뚱그려서 모두 포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저 지도를 잘못 해석하면 마치 이성계가 현대의 간도 북부와 연해주 지역 일부까지 지배한 인물로 오해할 수 있다. 이성계가 당대 만주 최고의 용사이면서 여진족에게도 통크게 베풀었기 때문에 동만주 여진족 족장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큰형님 취급을 받은것일 뿐, 결국 이성계가 동족인것도 아니고 여진 부족들을 규합한 것도 아니었기에 만주 유목세계의 지존인 한(카간)으로는 대우받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냥 '고려놈이긴 하지만 존나 짱쎈 양반이 더이상 개기지만 않으면 한턱 크게 쏴준다는데 받들어주고 떡고물이나 먹자' 정도 마음으로 따른 것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