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종(조선)/평가 (문단 편집) ===== 외척 학살에 대한 변명 ===== 유가적 법치주의를 표방하며 조선의 기틀을 세운 태종이 정작 처가와 사돈 집안을 죽일 때에는 혐의날조와 증거조작을 통해 거의 죄를 멋대로 지어내서 (오늘날 기준으로는) 명백히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어 사법살인을 했다는 점에서는, 수백년의 시간차를 감안해도 마치 막장 독재국가의 보위부가 하는 인권탄압과 다를게 무엇이 있느냐는 비판이 나올 수도 있겠다. 이들에게 확인 된 죽을 죄가 없다는건 실록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유추가 가능할 정도이니 당시 대신, 사관들도 다 알고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태종의 브레인인 하륜도 죽을 죄는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 자기가 날라갈 뻔했기도 하고. 하지만 이러한 조치에는 '''전근대 동아시아 군주정 체제의 가장 큰 허점이 바로 외척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한다.''' 죄가 없는데도 외척을 죽였다고 말이 많지만, '''원래 외척은 죄가 있어도 제대로 처벌할 수가 없었다.''' 특히 외가는 죽을 죄가 아니라면 덮어지기 일쑤고 죽을 죄라도 죽일 수가 없어, 그대로 군주에게 통치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모후가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엎드려 비는걸 무시하면 유교의 기본 덕목인 효에 어긋나기 때문에, 웬만한 횡포로는 건드릴 수가 없었다. 특히나 세종처럼 피를 보기 싫어하는 군주라면 더더욱 그리하였다. 물론 후대에는 처가까지는 어느정도 갈아버리는 왕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 경우에는 왕비부터 때려잡고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거고 거기에 환국이라는 대대적인 붕당학살이 동반되어, 차라리 태종이 벌였던 일은 양반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더구나 당시에는 태종도 건드릴 수 없는 초대형 외척이 있었으니 바로 청주 한씨였다. 한확이 누나와 여동생을 명나라 황실에 공녀로 바쳐 명나라 황제의 외척이 되었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처벌을 할 수없다고 대놓고 왕이 한 말까지 실록에 기록되어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한확은 명나라 조정을 상대로 충실히 로비를 해서 공녀 폐지등 공로라도 세웠고 패악질이 엄청나게 심하진 않았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외척 개개인이 심온처럼 선하고 유능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 가솔들이 모두 그처럼 선하고 유능할 수는 없고, 외척 쯤 되면 그 집안 노비들까지도 기세가 등등해져서 횡포를 부리는 것이 흔했다. 태종은 그 외척의 본질적 폐단을 궤뚫어보고 지속가능한 법치를 위해 자신에게 권력이 집중되어있을때 과감하게 전성기의 처남들과 사돈을 죽인 것이다. 이는 사후에까지 남기는 "외척은 죽고싶지 않으면 철저히 숙이고 살아라"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조치로 조선은 다음 왕과 다다음 왕, 다다음왕까지 외척의 횡포에서 자유로울수 있었다. 수양대군이 쿠데타로 집권한 뒤 훈구 권신을 무럭무럭 양성해 사실상의 왕비족을 만드는 바람에 모조리 물거품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또한 태종의 외척 숙청으로 인해 훗날 종친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지고 수양대군을 견제하고 단종을 지켜줄 외척이 없어서 계유정난이 일어났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것도 어느정도만 맞는 이야기이다. 정확히는 계유정난 자체는 분명 외척이 없는 것도 원인인건 맞았다. 그런데 [[외척]]이란것은 결국 왕비이면서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인 (대)왕[[대비]]를 핵심 구심점으로 하여 권력을 형성하고 얻는 세력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 왕비가 죽으면 외척도 거의 필연적으로 권력을 잃는다.''' 실제로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친정도 엄연히 외척이면서 남동생인 권자신이 관직에도 있고, 따로 세종이나 문종의 숙청이나 견제가 아예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덕왕후가 세자빈 시절에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일찍 사망하면서 외척으로서의 권력을 일찍부터 상실했다. 실제로도 계유정난의 전후 국면에서 현덕왕후의 친정은 거의 힘을 쓸 수 없었으며 오히려 남동생인 권자신이 조카인 단종을 복위하려다 발각되자 부부인인 어머니와 함께 꼼짝없이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것은 현덕왕후의 이른 사망 하나로 인해 외척의 태생적인 권력 쟁취 구조가 발현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태종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일이며 실제로 계유정난은 이것이 원인이 된게 가장 컸다. 태종과 연관되있다 볼 수 있는 [[소헌왕후]]도 거의 마찬가지인게 소헌왕후는 아들인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의 연이은 사망으로 충격을 받고 쇠약한것도 사망 원인이긴했지만 당시 시대 기준으로 사망 나이가 이미 노년에 속했다. 설사 세종이 심씨 가문의 복권을 일찍 해서 심씨 가문이 다시 강해진다고 해도 결국 소헌왕후가 세종보다 먼저 사망한 이상 외척으로서의 힘을 잃었다는 것이다. 훗날 세도정치로 악명높은 안동 김씨도 본인들의 왕비이자 왕실 최고 어른인 [[순원왕후]]가 승하하고 풍양 조씨 가문의 왕비인 신정왕후 조씨가 대왕대비가 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이 꺾일 조짐이 보이다가[* 이것도 사실 철인왕후가 살아있고, 일찍부터 권력의 기반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마저도 철종이 자식을 아예 못 낳고 사망하며, 대왕대비인 조씨가 왕실최고어른의 자격으로 고종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수렴청정을 하면서 자식이 없는 왕대비에 불과한 철인왕후의 후광만으로 외척의 지위를 유지하는게 불가능해졌기에 흥선대원군과 타협해야했다.] 철종까지 자식 없이 사망하고 더 이상 권세를 누리지 못하였고, 안동 김씨를 계승하여 고종 대 외척이 된 여흥 민씨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사망하면서 권세를 잃어야했지만 국왕인 고종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비호로 권세를 유지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태종은 외척의 중심으로서 왕비가 왕의 발목을 잡는 것을 싫어했던 것이지, 왕비 자체의 필요성까지 무시한 쪽은 아니었다. 왕비 자체의 필요성을 무시했다면 소헌왕후든 원경왕후든 폐위까지 하고 새로 왕비를 들이지 않게 할 수도 있었을것인데 그러지 않았다는건 내명부의 수장이자 국왕의 아내로서의 왕비 지위가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태종의 아들과 손자인 세종과 문종은 내명부와 왕비 자리의 중요성을 간과한채 소헌왕후의 3년상 이후에도 본인들의 왕비를 들이지 않아서 내명부의 일원들이 통제에서 사실상 벗어나는데 일조를 크게했는데 결국 (내명부에 속한) 본인들의 후궁들과 그 자식들인 왕자들과 옹주들, 심지어 대군들까지도 상당수가 변절하여 세종과 문종을 배신하고 수양대군에게 붙어서 정통성 최강자이자 적장손인 단종을 끌어내는데 적극적으로 협조 및 방관하는 나비효과가 일어난것이다. 이들의 변절에는 내명부 수장의 자리가 공석이 된것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내명부도 내명부지만 원래 왕비의 역할 중 하나가 후궁과 그 자식들을 통제하여 적장자-적장손의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는것도 있다. 이 역할은 생각보다 비중이 높으면서 중요한데 이 역할을 할 내명부의 자리가 소헌왕후의 사망인 1446년을 기점으로 하여 계유정난이 일어나며 단종이 정순왕후 송씨를 억지로 맞아들이는 1453년까지 무려 7년이나 비었다. 아무리 권한 대행이 있고 연이은 초상이 일어난것을 감안해도, 7년동안이나 후궁과 그 자식인 왕족들이 왕비의 통제에서 벗어나있는 것은 큰 문제이며 이 7년이라는 시간이면 왕위에 일찍이 욕심이 있었을 수양대군이 은밀히 사전에 본인의 편으로 후궁들과 왕족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