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평천국 (문단 편집) == 군사력 == 태평천국은 과거의 [[황건적]]과 같은 무리와는 상궤를 달리하는 군사력을 보유했는데 이것은 태평천국 특유의 시스템에서 비롯됐다. 우선 [[홍수전]]은 처음 금전촌(金田村)에 단영(團營)이라는 군사 조직을 설치해서 남녀를 분리하고 모두 입대시켜 군사 훈련을 강행했다. 이들은 고향인 [[광서성]]에서 시작하여 수많은 전투와 포위를 뚫고 [[호남성]], [[호북성]] 등지를 전전하면서 자연히 실력은 상승했다. 거기에 반란 초기 합류한 [[나대강]] 등이 이끄는 천지회는 [[수전]]과 [[보급]]의 지식을 더했다. 이런 요소들에 힘입어서 태평천국은 다양한 전술을 구사했는데 대표적인 예시로 태평천국군의 주 전술은 [[부교]]를 설치한 후 [[대포]]를 통한 [[폭격]]이었다. 또 [[난민]]을 성에 잠입시키거나 주로 광서와 호남 출신의 [[광부]]를 동원하여 [[땅굴]]을 만들고 [[화약]]으로 성벽을 파괴하거나 [[참호]]를 통해서 저항하는 등 다양한 전술을 사용했다. 거기에 [[태평천국의 난]] 당시 [[상하이]]와 같은 [[조계]]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은 무기를 [[청나라]] 말고 태평천국에도 팔아서 태평천국군은 [[총기]]와 같은 무기를 많이 사용할 수 있었다. 또 태평천국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는 빈민이 많았는데 이런 이들은 그들이 믿는 종교에 심취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당대 청나라 장수들의 보고나 기록에 [[포로]]가 된 태평천국 하급 병졸도 배신하거나 목숨을 구걸하는 경우가 적었다고 적혀 있으며 얼치기 반란과는 달리 엄격한 군율을 유지하여 태평천국군은 사기가 높았다. 하지만 단점도 존재했는데 군을 통솔하고 지도할 최고 [[사령부]] 및 [[총사령관]]이라고 할 만할 존재가 없었다. 거병 초기에는 [[홍수전]]과 [[풍운산]]이 중심을, [[위창휘]]의 자본을 바탕을 기반으로 하여 [[양수청]]과 [[소조귀]]가 정치, 행정을 통제했지만 천경사변 이후 [[양수청]], [[위창휘]], [[진일강]]이 죽고 [[석달개]]가 이탈하면서 확실한 구심점이 사라졌다. 이에 태평군은 후기 지도자인 [[이수성(태평천국)|이수성]], [[진옥성]], [[이세현]], [[양보청]] 등의 지도력 및 군재로 버텼지만 확실하게 양수청처럼 [[통수권]]을 쥔 지휘관이 없어서 작전의 전개는 각 사령관들이 회합하여 진행시킬 수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