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니스 (문단 편집) === 기타 === * [[2018 평창 동계올림픽/대한민국 여자 팀추월 대표팀 논란]]을 계기로, 한 익명의 한국 전직 테니스 선수가 한국 체육협회의, 특히 한국 테니스계 운영을 맡은 지방협회들에 부당한 관행을 내부고발을 하였다.[* 단, 당시 내부고발자는 집단괴롭힘이 루머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을 감안하고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대부분의 지방협회의 선수들이 [[서울]]로 이사를 가고 싶다는 낌새를 보이면 운동에 지장이 갈 정도의 길고 긴 자격정지를 먹이겠다고 협박하여 마지못해 원래 지역에 남거나 항의하다가 자격정지를 받는 일들을 수도 없이 겪었다고 증언하였다. 당시에는 이슈가 묻혔지만, 한국체육협회가 직권남용의 관행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안하무인의 권력을 휘두른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 드러난 고발이었다. [[http://www.etoland.co.kr/bbs/board.php?bo_table=hit&wr_id=1078388|#]] * 테니스공의 경우 특별한(?) 용도로 쓰이기도 한다. 바로 식탁이나 의자의 다리에 씌우는 '체어 슈즈'. 테니스공을 적절히 잘라내면 식탁 및 의자의 다리에 잘 맞게 들어가고 쿠션 효과도 적절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테니스공을 이 용도로 재활용하는 사례가 많다. * 한 게임의 점수가 특이하게 15-30-40으로 올라가는 것의 유래는 게임의 진행을 시계의 분침에 비유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4점을 따면 한 게임을 이기게 되므로 시계의 한 바퀴의 4분의 1인 15를 한 판의 점수로 주게 되었는데, 듀스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3:3의 동점인 상황에서 두 점을 연달아 득점해야 게임을 이기게 되었다. 때문에 60이 되면 한 게임을 이기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3점이 45였던 것을 40으로 바꾸고 듀스 상황에서는 10씩 나아가는 것으로 변경하였다고 한다. * [[테니스 치마]]는 원래 말그대로 여성 테니스 선수들이 경기 중 입던 복장이 여자 아이돌, 치어리더, 젊은 일반인 여성들이 입는 일상 의류가 된 것이다. * [[테니스 엘보우]]라는 질병도 있다. 명칭은 테니스에서 유래하였으나 다른 운동이나 작업으로 인하여 생기는 경우가 훨씬 많다. * [[다이아몬드]] 및 여타 보석이 한 줄로 연결된 [[팔찌]]를 가리키는 '테니스 팔찌'는 이 스포츠에서 유래했다. 70년대 여자 테니스 스타인 크리스 에버트(Chris Evert)는 늘 경기 때마다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세팅된 팔찌를 차고 나왔는데, 어느 날 경기 도중 팔찌가 끊어지며 다이아가 사방팔방 흩어졌고 이때문에 경기를 중단하고 다이아몬드를 하나하나 줍는 모습이 생중계 되었다. 그 후부터 당시 크리스 에버트가 착용했던 스타일의 팔찌를 이처럼 부르게 된 것. 지상 최강의 보석인 다이아몬드가 최소 십수 개 세팅된 만큼 매우 고가의 주얼리이며 다이아의 등급이나 크기에 따라 가격 역시 천차만별로, 보통 예물반지에나 사용할 법한 2~3부 화이트 다이아로 테니스 팔찌를 만들면 천만원대는 우습게 넘어갈 수도 있다. 대체석으로 모이사나이트나 랩 그로운 다이아, 큐빅 등을 세팅하여 비용을 대폭 절감시킨 제품도 많이 나오고 있다. * 여담으로 [[구한말]], [[땀]]을 내면서 열심히 테니스 치는 서양 외교관을 보고 [[고종황제]]가 '저런 힘든 일은 아랫것이나 시키지'라고 말했다는 [[루머]]가 있다. 이 이야기는 대원군, 고관, 그냥 양반으로 거의 동일한 얘기가 전하며 심지어 이야기의 국적만 다른 이야기도 있다. 종목만 다를 뿐 조선도 스포츠의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선비의 기본덕목으로 꼽히는 육예(六藝) 중에 활쏘기와 말타기나, 오래전에 전래되어서 왕들이 즐겼던 격구가 [[스포츠]]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다만 격구는 조선 중후기부터 쇠퇴하여 백성들의 민속놀이 형태로만 남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지배층의 구기 스포츠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음을 반영한 야사일 수는 있다. 이는 [[연산군]] 등 무예를 즐겼던 일부 군주의 악행으로 인해, 한동안 군주의 무예나 오락 활동이 상당히 경계되는 풍조가 나타나면서 생긴 현상이다. [[정조(조선)|정조]]와 같이 문무를 겸비한 국왕은 매우 희귀한 경우였으며, 그의 아버지였던 [[사도세자]]가 [[영조|아버지]]의 눈 밖에 났던 원인 중 하나도 무예를 좋아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