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르시오 (문단 편집) == 영향과 한계 == 결국 이러한 장창과 화승총의 조합으로 기사들은 점점 사라지고 대신 [[퀴레시어]] 기병대가 등장했다. 또한 스페인 테르시오뿐만 아니라 화승총병과 장창병을 모을 수 있는 군사집단들 대다수가 테르시오와 유사한 Pike & Shot(말 그대로 장창병과 사수) 형태의 대형을 짜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란츠크네히트]] 역시 장창방진을 총병이 둘러싸는 방식으로 싸웠으며, 돌격대로 유명한 [[도펠죌트너]] 역시 이러한 진형에서 총병의 역할과 양손검병의 역할을 유연하게 수행하는 집단이었다. 또한 [[네덜란드]]의 장군 [[마우리츠 판 나사우]]는 이 테르시오를 격파하기 위해 장창병의 비중은 줄이는 대신 점점 발전하는 총기의 막강한 화력에 의존하는 선형진을 개발했다. 첫 실전 투입인 [[니우포르트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으나, 선형진을 짠 보병대도 스페인 테르시오들을 격퇴하지는 못 했고, 오히려 테르시오에게 밀려버리고 말았다. 강력한 화력으로 테르시오에 큰 피해를 주기는 했지만, 접근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고, 접근전에서는 장창병의 비중이 높은 테르시오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 전투에서는 네덜란드군이 승리했다. 왜냐면 테르시오가 선형진을 거의 다 붕괴시키자 스페인 병사들이 성급하게 이겼다, 전투 끝이라고 판단하고 전리품 챙기겠다며 흩어지면서 테르시오의 대열이 먼저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선형진이 완벽하게 테르시오를 격파한 것은 1631년의 [[브라이텐펠트 전투]]가 되어서였다. 구스타프 아돌프의 스웨덴군은 테르시오에 비해 훨씬 높은 총병의 비율과 보병의 화력을 지원하고 장전시의 공백을 메우는 연대포를 다수 도입하여 지속적으로 폭발적인 화력을 낼 수 있도록 하여 순식간에 테르시오를 붕괴시켰다. 그리고 이 전투 이후 총기를 앞세운 선형진은 테르시오를 점점 압도했고, 스페인 테르시오는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웨덴군]]을 '''증발'''시키는 기염을 토했지만[* 단, 이는 스웨덴군 지휘부의 두 장군이던 구스타프 호른과 베른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의 불화의 영향이 크다.] 끝내 1643년에 벌어진 [[로크루아 전투]]는 테르시오의 150년 가까이 되는 무적신화를 깨버렸다. 또한 화포의 화력이 발전함에 따라 기존의 밀집대형은 오히려 '''떼죽음'''을 야기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결국 테르시오 대형은 점차 자연스럽게 해체되어 창병이 사라지고 대형도 밀집대형에서 선형 대형으로 바뀌어 [[전열보병]]이 등장한다. 하지만 스페인의 무적 전설이 종료된 로크루아 전투에서조차 '''"스페인 테르시오"는 붕괴되지 않았다'''. 스페인 테르시오는 [[프랑스]] 정예보병들을 일시적으로 물러나게 만들었으며, [[기병]]대가 어이없이 패퇴하고 [[왈롱]]([[벨기에]]) 테르시오가 달아나 고립된 상태에서도 대포를 동원한 프랑스군의 기병돌격을 4차례나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프랑스 지휘관인 콩데 공작은 스페인 테르시오가 깃발과 무기를 들고 전장에서 물러나는 것을 허용했다. 한 시대 위에 군림했던 무적의 병과에 걸맞는 영예로운 퇴장이었다. 테르시오 편제 자체는 로크루아의 패배 이후에도 계속해서 유지되면서 30년 전쟁 이후에도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는 등 활약하나, 당시 급속한 화기의 발달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전열이 얇아지는 등 선형진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화하였으며, 최종적으로 1704년 [[펠리페 5세]]의 군제 개혁으로 근대적 대대/연대 편제로 개편되면서 완전히 퇴장한다. 다만 스페인군에선 지금도 관용적으로 연대급 부대를 테르시오라는 역사적 명칭으로 부르긴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