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살로니키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external/www.bakogiorgos.gr/thessaloniki_1_bg.jpg]] [youtube(i2R11kio3_A)] 기원전 315년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을 지배하던 [[카산드로스]]가 처음 도시를 건설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이자 자신의 부인이었던 테살로니케(테살로니키의 고대 발음)의 이름을 붙였다. 그 뒤 중요한 항구 도시로 성장했으며, 기원전 146년 마케도니아 왕국을 멸망시킨 [[고대 로마]]에 의해 마케도니아 속주의 주도가 되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라틴어로 테살로니카라고 불렸으며, [[이탈리아]]에서 제국 동방으로 가는 중요한 도로인 [[https://en.wikipedia.org/wiki/Via_Egnatia|에그나티아 가도(Via Egnatia; Egnatian Way)]]의 중간 기착지 중 하나였다. [[파일:733px-Via_Egnatia-en.jpg|width=75%]] 콘스탄티노플 건설 이전, 즉 고대 로마 시절 에그나티아 가도의 지도이다. 이를 보면 왜 테살로니키가 요충지가 되었는지 알 수 있다. 해안선으로 볼 때 에게 해의 유럽 쪽(그리스 및 트라키아) 해안선이 테살로니키를 기점으로 하여 남북축과, 에그나티아 가도와 거의 일치하는 동서축으로 갈려 있다. 다시 말해 테살로니키는 남쪽 끝에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둔 남북축과, 서쪽 끝에 [[디라키움]][* 에피루스 일대의 최대도시이며, 나아가 [[아드리아 해]] 및 [[이오니아 해]]와 접하는 발칸 반도 서해안 전체로 꼽아도 손꼽히는 거점이었다] 및 동쪽 끝에 비잔티움을 둔 동서축의 결절점이다. 한편 지도를 잘 보면 테살로니키 인근의 바다가 안으로 쑥 들어가 있는 [[만(지리)|만]]이라 이 자체로 이미 천연 항구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바로 동쪽에 [[삼지창]]처럼 생긴 할키디키(Χαλκιδική) 반도가 있어서 바다로부터의 외침에 [[방파제]] 역할을 해 주기 때문에, 바다를 향해서 너무 탁 트인 항구들에 비해서 안보적으로 훨씬 좋은 조건이다. 이러한 장점들이 제정 초기까지는 그리 중요하게 대두되지 않았는데(물론 [[신약성경]] [[테살로니카서]]의 무대가 되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절대 시골은 아니었다), [[3세기의 위기]]로 국방소요가 폭증하면서 너무 후방에 있지 않았고 다뉴브 전선 및 동방 전선과의 교통 통신이 수월하여 [[사두정치]] 때에 이미 발칸 지역의 중심지가 되었던 데다가, 위에서 서술한 동서축의 동쪽 끝 비잔티움이 콘스탄티노플로 새단장하면서 완전히 만개했다. 이는 곧 콘스탄티노플 건설 이전에 그리스 지역을 대표했던 [[아테네]], [[스파르타]] 등으로부터 역할을 뺏어왔다는 이야기도 되어서, 고대 후기 이후로 원 그리스(아카이아, 펠로폰네소스 등) 지역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제법 거리가 있었던 점 + 이슬람 흥기 이후로는 [[에게 해]]의 남쪽 입구와 가까워서 해적질, 습격 등을 당하기 쉬웠던 점 등으로 쇠퇴했다. [[동로마 제국]]이 서기 7세기에 거대도시인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를 잃고, 에게 해 연안의 주요 대도시들이었던 [[에페소스]], [[스미르니]], [[아테네]] 등이 쇠락하면서 테살로니키가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사실 같은 7세기에 동방에서 페르시아 및 이슬람 세력과 사투를 벌일 때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졌던 발칸 반도는 다소 방치되었고, 그리하여 아바르 및 슬라브족의 침략에 해안지역 몇 곳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침탈되었다. 테살로니키도 이 때 동로마가 가까스로 지켰던 곳 중 하나였는데, 610년대에 이르면 시가지 자체가 성내로 쪼그라들고 주변의 슬라브인 정착지들에 둘러싸여, John V. A. Fine이라는 관련 사학자에 의하면 ''''사실상 슬라브의 바다에 떠 있는 로마의 섬과 같았다''''고 할 정도였다.[* [[영어 위키백과]]의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Thessalonica_(676%E2%80%93678)|Siege of Thessalonica (676–678)]]에 'By the 610s, the city of Thessalonica was surrounded by large Slavic settlements, being reduced to itself within its wall, according to historian John Van Antwerp Fine, to "'''virtually a Roman island in a Slavic sea'''"'라는 대목이 나와 있다. 출처는 [[https://books.google.com/books?id=Y0NBxG9Id58C|'The Early Medieval Balkans: A Critical Survey from the Sixth to the Late Twelfth Century']]이고 이 책은 Florin Curta의 'The Making of the Slavs: History and Archaeology of the Lower Danube Region, c. 500–700' 및 ' Southeastern Europe in the Middle Ages, 500–1250'와 더불어 고대 후기~중세 전기의 발칸반도에 대해 다룬 괜찮은 책으로 인정받고 있다.]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ssalonica|Battle of Thessalonica]]에 따르면 이 시기에만 테살로니카 및 그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공성전이 5번이나 된다. 586년 혹은 597년, 604년,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Thessalonica_(615)|615년]],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Thessalonica_(617)|617년]],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Thessalonica_(676%E2%80%93678)|676-678년]]. 특히 맨 뒤의 676-678은 시간대를 잘 보면 알 수 있지만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과 동시에 일어났는데, 중앙정부가 당연히 수도 콘스탄티노플 방어에 몰두해 있는 틈을 타 슬라브인들이 기회를 포착했다고 한다.[*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Thessalonica_(676%E2%80%93678)|Siege of Thessalonica (676–678)]] 중, 'The Siege of Thessalonica in 676–678 was an attempt by the local Slavic tribes to capture the Byzantine city of Thessalonica, '''taking advantage of the preoccupation of the Byzantine Empire with the repulsion of the First Arab Siege of Constantinople.''''] 즉 제국의 제1·제2의 도시가 동시에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 이전 604, 615, 617년도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온 신경을 쓰는 틈을 타 아바르인 및 슬라브인이 배후를 노렸던 것이다. 여하튼 중세 초기 인구는 대략 수만 명, 중기와 말기에는 대략 10만~15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인구 30만~50만으로 추정되는 초거대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외하면 유럽 전체에서 가장 큰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다. 904년에는, 원래 동로마 출신의 전향자였으며 아바스에서는 [[트리폴리(레바논)|트리폴리]]를 연고로 하여 그 지명이 붙었고 반쯤은 [[사략 해적]]의 수장이었던 [[https://en.wikipedia.org/wiki/Leo_of_Tripoli|트리폴리의 레오]]가 [[https://en.wikipedia.org/wiki/Sack_of_Thessalonica_(904)|일시적으로 점령 및 약탈했었던]] 적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동시대에 같은 부류의 인물로서 활동했던(동로마 출신 전향자, 911년 키프로스 일시 점령 및 약탈) [[https://en.wikipedia.org/wiki/Damian_of_Tarsus|타르수스의 다미아노스]]도 참고하면 좋다. 중세 테살로니키는 위에서 접했듯 그리스-발칸 반도 지역의 육로와 에게해로 통하는 해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바로 다음으로 크고 중요한 도시였다. 이 때문에 앞서 개요에서 언급된 제국 공동 수도라는 별칭도 생겼다. 다만 [[서울 공화국|콘스탄티노폴리스의 크기와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컸기 때문에]] 그리스어로 그냥 도시(Η πολή, 이 폴리)라고 하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다른 도시들은 모조리 마을(η χώρα, 이 호라)로 불렸으며 테살로니키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안나 콤니니]]는 그의 저서 [[알렉시아스]]에서 테살리아(θεσσάλια)의 마을(χώρα)이라는 표현을 썼다. 1080년대 [[알렉시오스 1세]] 시대 초기에 [[노르만족]]이 [[디라키온]]을 함락시키고 테살로니키에서 100여km 정도 떨어진 [[라리사]]까지 진출했으나 결국 테살로니카까지는 못 치고들어왔다.[*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Byzantine%E2%80%93Norman_wars|Byzantine–Norman wars]] 중, 'Led by the formidable Robert Guiscard and his son Bohemund of Taranto (later, Bohemund I of Antioch), Norman forces took Dyrrhachium and Corfu, and laid siege to Larissa in Thessaly (see Battle of Dyrrhachium).'] 하지만 100년 지나고 나서 1180년대에는 달랐다.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Sack_of_Thessalonica_(1185)|Sack of Thessalonica (1185)]]에 의하면, 시장을 맡고 있던 다비도스 콤니노스가 방어를 소홀히 했고, 심지어 공성 준비를 하는 시칠리아(노르만)군이 공성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성 안에서 급습하는 것도 엄금했다.[* 'David Komnenos, the governor of the city had neglected to make sufficient preparations for the siege, and even forbade sallies by the defenders to disrupt the Norman siege works.'] 또한 외부에서의 구원군도 제대로 조율이 안 되어서 동쪽 성벽에 균열이 나 손쉽게 함락당했다.[* 'The Byzantine relief armies failed to coordinate their efforts, and only two forces, under Theodore Choumnos and John Maurozomes, actually came to the city's aid. In the event, the Normans undermined the city's eastern wall, opening a breach through which they entered the city.'] 이후 수습 과정에서 발견된 시신만 7천여 구라고 할 정도로 대참극이 벌어졌다.[* 'The conquest degenerated quickly into a full-scale massacre of the city's inhabitants, some 7,000 corpses being found afterwards.'] 몇 년 전 1182년 안드로니코스 1세의 [[라틴인 학살]]에 대한 보복 성격도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족 또한 카톨릭을 받아들인 지 백 년이 넘어서 저 '라틴인'의 범주에 당연히 포함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Sack_of_Thessalonica_(1185)|Sack of Thessalonica (1185)]] 중, 'Coming on the heels of the usurper Andronikos Komnenos's massacre of the Latins in Constantinople in 1182, the massacre of the Thessalonians by the Normans deepened the rift between the Latins and the East.'및 [[https://en.wikipedia.org/wiki/Byzantine_Greeks|Byzantine Greeks]] 중 'The event and the horrific reports of survivors inflamed religious tensions in the West, leading to the retaliatory sacking of Thessalonica, the empire's second largest city, by William II of Sicily.'], 어디 변방 도시도 아니고 제국 제2의 도시가 이렇게 어이없게 털리고 주민들도 많이 죽은 이 사건으로, 안 그래도 폭군이면서 동시에 암군이라 제위 유지가 위태위태하던 [[안드로니코스 1세]]는 직격탄을 맞아 반란으로 험한 꼴을 당하며 죽었다.[* 'It also directly led to the deposition and execution of the unpopular Andronikos I Komnenos by the Latins and the rise to the throne of Isaac II Angelos.'] 1204년 [[4차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고 얼마 되지 않아 테살로니키도 함락되었으며, 십자군 봉건 국가 [[라틴 제국]]의 봉신 영지인 테살로니카 왕국이 되었다가 1242년 [[니케아 제국]]에 의해 수복되었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고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키면서 다시 제국 제 2의 도시가 되었지만, 제국의 국력이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1342년에는 [[https://en.wikipedia.org/wiki/Zealots_of_Thessalonica|열심당원(Zealots of Thessalonica)]]이라고 자칭한 도시 하층민들의 반란으로 공화정부가 수립되어 8년 동안 독립을 유지하다가 패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는 [[요안니스 5세]]와 [[요안니스 6세]] 간의 [[팔레올로고스 내전#s-3]] 과정에서 6세가 임명한 시장을 몰아내고 5세의 편을 들며 일어났으며, 여기에 [[4차 십자군]] 이후 콘스탄티노플의 절대적인 제국 내 권위가 일단 한 번 무너지자 테살로니카 내부에서 생긴 독자의식(언제까지 콘스탄티노플에 치여만 살 거냐)이 합쳐졌다고도 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Zealots_of_Thessalonica|Zealots_of_Thessalonica]] 중, 'Wealthy and at almost populous as the capital, its people had already resented control from the far-off capital,'] 그래서 요안니스 5세와 6세의 내전이 1347년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테살로니카는 콘스탄티노플의 명령을 무시하고 1350년까지 독자행보를 했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Zealots_of_Thessalonica|Zealots_of_Thessalonica]] 중, 'In 1347 Kantakouzenos and the emperor John V reconciled, but the Zealots ignored the orders from Constantinople,'] 1389년에는 [[오스만 술탄국]]의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항복했고, 이후 동로마와 오스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가 1423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양도되었다. 베네치아의 힘으로 그나마 좀 더 버텨 보려는 심산이었으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1430년 [[무라드 2세]]의 군대에 의해 최종적으로 정복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셀라니크(Selanik)라고 불렸는데, 테살로니키를 살로니키라고 줄여 부르던 것이 터키식 발음으로 변형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과 같은 지역을 중심지로 삼은 지정학적 후계 국가인 만큼 테살로니키는 오스만 제국 시대에도 번영하는 주요 대도시 중 하나로 남았다. 16세기에는 [[스페인]]에서 [[레콩키스타]] 종료 이후 추방된 [[유대인]]들이 유입되어 1519년에는 유대인 인구 비중이 절반을 넘길 정도가 되기도 했다. 19세기 말에는 철도, 전등, 전차가 도입되는 등 근대화되었으며, 그리스와 발칸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20세기 초반까지도 테살로니키는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 계속 남아있었다.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이 여기서 발발했으며, [[터키]]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케말 아타튀르크]]도 테살로니키에서 태어났다. 아타튀르크는 오스만 제국의 대표적인 대서방 교역창으로서 국제적이고 근대 문물로 가득했던 이 도시를 깊게 사랑했으며, 훗날 젊은 장교 시절 테살로니키가 그리스로 넘어가자 동료 장교들을 다그칠 때 "우리의 고향 셀라니크가 적에게 넘어갔는데 아직도 [[술탄]]의 녹을 먹고 있는 자네들은 여기서 뭐하고 있는가?" 라는 식으로 책망하곤 했다.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이 터지면서 [[그리스]]와 [[불가리아]]는 이 도시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그리스 수상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마케도니아 방면으로 진격하는 그리스군이 테살로니키와 마나스트르[* Manastır. 현 [[북마케도니아]]의 도시 비톨라(Битола). 테살로니키와 더불어 마케도니아 지방을 대표하는 양대 도시였다. 여기는 세르비아군이 점령했다.] 중 어느 도시로 진격할 것인지 결정해 줄 것을 요청해오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테살로니키를 점령하라!(Θεσσαλονίκη με κάθε κόστος!)"고 지시했다. 1912년 11월 8일 결국 그리스군이 입성하여 오스만 제국군의 항복을 받았고[* [[불가리아]]군은 11월 9일, 테살로니키가 그리스군에게 항복한 '''그 다음 날'''에 도착했다(...). 그리고 고작 하루 차이로 테살로니키가 그리스에게 넘어간 것에 대해 허탈해 한 불가리아군 인사들에게 테살로니키를 방어하던 오스만군 사령관이 한 발언이 일품인데 "미안하오만 내겐 테살로니키가 하나 밖에 없었다오."], 1913년 3월 국왕 [[요르요스 1세]](Γεώργιος Αʹ)가 이 곳을 방문했다가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으며, 같은 해 8월 부쿠레슈티 조약에 따라 완전히 그리스 영토가 되었다. 1912년 전쟁으로 테살로니키를 비롯한 그리스 북부, [[크레타]]가 새로 [[그리스 왕국]]으로 편입되기는 했지만 [[아테네]] 등 중남부 지역과는 이미 80년이나 다른 나라로 살아온터라 그리스는 테살로니키에 마케도니아 총독부를 설치했고, 1955년 북부그리스부(部)로 개편될 때까지 총독부가 남아있었다. 이 부서는 지금도 그리스 내무부 산하 부처로 격하되어 존재한다.[[http://www.mathra.gr/|홈페이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연합군]]이 [[불가리아]] 방면으로 진격하기 위한 교두보가 돼서 50만이라는 상당한 숫자의 군대가 모인 적도 있었다. 비록 진격 자체는 전쟁 끝에 가서야 제대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1917년에는 대화재로 도시 중심부가 홀랑 타버리기도 했다. 1923년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때는 16만이 넘는 피난민을 받아들였다. 반면 튀르키예로 떠난 무슬림은 2만 명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이탈리아 왕국]]의 폭격을 받았으며, 뒤이어 개입한 [[나치 독일]]의 [[그리스 침공]]을 맞은 그리스가 이 도시와 주변 지역을 포기할 수 없어서 이 도시와 동부 영토를 보호하는 메탁사스 방어선에 상당한 병력을 투입했고, 결국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방어선을 지키려다가 독일군이 방어선의 빈틈을 노리고 파쇄공격을 하는 통에 순식간에 함락(1941년 4월 8일)된 역사도 있다. 이 당시만 해도 테살로니키는 [[유대인]]이 많은 도시였지만 나치 독일이 그리스를 점령하면서 수용소로 끌고 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