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오도레투스 (문단 편집) == 생애 == 프랑스 교회 역사가 루이 세바스티앙 틸레몽트에 따르면, 393년 안티오키아에서 부유한 집안의 자식으로 출생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부모는 결혼 후 오랫동안 자식을 갖지 못하다가 12년만에 자식을 겨우 얻게 되자 '신의 선물'이라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는 부모로부터 받은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그리스어, 시리아어, 고전 문학, 철학, 신학을 숙달했다. 또한 은둔자 마케도니우스로부터 금욕주의를 지도받아 안티오키아에서 설교자가 되었다. 부모가 죽은 뒤 아파메아에서 [[수도자]]가 되었고, 423년 키로스의 주교로 선임된 뒤 금욕적인 생활을 지속하면서 이교도, [[유대인]], [[아리우스파]], [[마르키온파]]를 개종하는 작업에 힘을 기울였다. 이 무렵, 그는 [[네스토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의 논쟁에 가담했다. 그는 안티오키아 대주교 요안니스 1세에게 네스토리우스가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의 테오토코스(Theotokos)를 받아들이도록 주선해달라고 요청했고, 요안니스의 요청에 따라 키릴로스가 네스토리우스를 반대하는 이유에 관한 글을 보냈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를 개인적으로 적대하지는 않았기에, 431년 [[에페소 공의회]] 이후 네스토리우스를 [[이단/기독교|이단]]으로 몰고 가는 것엔 동의하지 않았다. 테오도레투스는 네스토리우스로 대표되는 안티오키아 파벌과 키릴로스로 대표되는 알렉산드리아 파벌을 화해시키기 위해 중재를 시도했다. 그러나 여러 번의 중재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어느새 네스토리우스파로 몰렸다. 특히 네스토리우스의 친구 이레네오스를 티레의 주교로 추천한 뒤에는 완전히 네스토리우스파로 간주되었다. 449년 제2차 에페소 공의회가 열렸으나, 그는 회의 참석 조차 거부되었다. 공의회는 그를 이단으로 판결하고 모든 글을 불사르라고 명령했다. 결국 그는 키로스를 떠나 아파메아의 수도원으로 은퇴해야 했다.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사망한 후 교황 [[레오 1세(교황)|레오 1세]]에게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며 구원을 호소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의 부름을 받고 참석하였고, [[네스토리우스파]]의 교리를 부정하는 조건으로 정통교회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 후 키로스에 돌아가서 문필 활동에 전념하다 457년경 사망했다. 514년 안티오키아 대주교 세베루스로부터 이단이라고 비난받고 역대 키로스 주교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테오도레투스의 저작들을 불태우기로 결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