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오도레투스 (문단 편집) == 작품 == 테오도레투스는 수많은 저서를 남긴 작가였다.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저작들이 불태워졌지만, 그의 탁월한 글에 감명받은 이들이 끈질기게 필사하거나 보관했다. 9세기의 동로마 황제 [[레온 6세]]는 테오도레투스의 저작을 소중히 보관했으며, [[미하일 프셀로스]]의 스승이었던 요안니스 마우로포스는 테오도레투스를 교회 박사로 칭했다. 서방에서도 [[르네상스]] 시기에 그의 작품들이 기독교 고전으로서 큰 인기를 끌었다. 피렌체 인문학자 아차이우올리는 그의 작품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훨씬 많은 독자들이 접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듯 인기가 많았던 덕분에, 그의 작품 대부분은 현재까지 전해진다. 427년에서 437년 사이에 <신성한 섭리에 관한 해석>과 <신성한 섭리에 관한 10대 담론>을 집필하였고, 440년대에 시리아 주교들의 금욕주의를 주제로 삼은 '시리아 주교들의 역사'를 출간해, 세속에 물들어가는 교회에 경종을 울리고자 하였다. 450년대에 집필된 <교회사>는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325년)부터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의 사망(428년) 사이의 기독교 역사를 다루었다. [[소조멘]]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가 교회사에서 제국의 정치사에 관심을 가진 데 비해, 그의 교회사는 오로지 교회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집중하며, 교회의 적에 대한 지속적인 투쟁을 강조했다.그는 [[아리우스파]] 논쟁, 배교자 [[율리아누스]]의 통치와 죽음, 이교 신전의 파괴, 페르시아에서 일어난 기독교인들의 박해 등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역사학자들로부터는 "소조멘과 소클라테스에 비해 객관성이 떨어져서 역사 탐구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비평을 받지만, 기독교 연구자들에게는 중요한 책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가 생전에 남긴 [[성경]] 주해는 당대 최고의 성경 해석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바울로의 서신에 관한 14개의 주석서를 남겼으며, 시편, 사무엘 등 선지자들, 열왕기, 연대기, 예레미아, 이사야, 다니엘서 등 성서의 방대한 부분에 주해를 남겼는데, 특히 구약 성경의 첫 8권의 논쟁적인 구절에 대한 문답을 정리한 주해서가 유명하다. 그는 주해서에서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걸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경은 비유와 은유로 이뤄져 있으므로, 그 의미를 탐구하여 해답을 얻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14세기의 수도자이자 역사가 니키포로스 칼리스투스에 따르면, 테오도레투스는 500통이 넘는 서신을 남겼다고 한다. 그중 현재까지 남은 편지는 179개이다. 이 편지들에서, 그는 주교의 의무를 상기시키고, 시리아 주교들의 엄격한 신앙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네스토리우스]]와 [[키릴로스]]의 극한 대립을 어떻게든 중재하려 했다가 졸지에 이단으로 몰리게 된 그의 고뇌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분류:동로마 제국의 역사가]][[분류:393년 출생]][[분류:457년 사망]][[분류:기독교 신학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