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번 (문단 편집) === [[우마이야 왕조|우마이야 칼리프조]], [[아바스 왕조|아바스 칼리프조]]와의 관계 ===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우마르 빈 압둘 아지즈가 당나라와 토번 제국으로 각각 사절을 파견하는데 이 중 티베트로 간 사람의 이름은 살라 빈 압둘라 하나피라고 알려져 있다. > 753년(신라 [[경덕왕]] 12년) 1월 1일, [[당나라]] 봉래궁(蓬萊宮)에서는 신년을 축하하는 의식이 거행됐다. 그런데 식장에 참석했던 신라 사신과 일본 사신 사이에 다툼이 벌어진다. 누가 더 서열이 높은 자리에 서느냐를 놓고 빚어진 갈등이었다. 애초 당 조정은 서반(西班)의 서열 '''1위'''에 '''[[토번]]'''(吐蕃) 사신, 2위에 일본 사신을, 동반(東班)의 서열 1위에 신라 사신, '''2위'''에 [[대식국]](大食國) 사신을 배치했다. 그런데 일본 사신 대반고마려(大伴古麻呂)는 “신라는 옛날부터 일본에 조공하는 나라인데 일본 사신보다 윗자리에 서게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당 관리들에게 항의했다. 당 조정에서 누가 더 높은 대접을 받느냐를 놓고 신라와 일본 사신이 벌인 이 다툼을 '쟁장(爭長) 사건'이라고 부른다. >---- > [[https://mnews.joins.com/amparticle/23981254|출처]] [[https://m.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181923650|출처2]] 당시 당나라에서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토번 제국을 우마이야 제국이나 압바스 제국보다 더 위협적으로 보고 더 우대해주었다.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 군이 패배한 이후에도 한동안 [[타림 분지]] 일대는 불교가 우세한 지역으로 남았는데 그 이유는 중앙아시아 일대의 패권을 두고 토번 제국과 압바스 왕조 사이의 전쟁이 대대적으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801년 티베트인들은 상당수의 압바스 병사들을 포로로 잡아 이들을 동부 국경으로 배치하였다 한다. 토번 제국과 압바스 제국은 중앙아시아 영토를 두고 대립을 계속하였는데, 한 쪽이 절대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고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호탄]] 일대에서는 티베트인들이 압바스 칼리프조 군대에 맞서서 영토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으나,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는 무슬림 군대가 812~815년부로 카불 일대의 티베트 총독에게 항복을 받아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