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크토아 (문단 편집) == 행적 == 어려서 동생 에센테무르와 함께 무주의 유학자인 오직방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남다른 힘을 발휘해 약 70kg의 활을 가볍게 당길 정도로 힘이 셌고, 1335년에 [[권신]] [[엘테무르]]의 아들인 [[텡기스]]의 일파를 숙청할 때 공을 세웠다. 1338년에 어사대부가 되어 법강과 풍기를 엄숙하고 바르게 했으며, 상도로의 북순을 돌다가 도중에 [[혜종(원)|토곤테무르]] 칸이 사냥을 가자고 하자 천자와 대신이 함께 치도를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그 책무이고, 사냥 등은 예외가 있지 않다고 충고했다. 텡기스 일파를 숙청하고, 숙부 메르키트 바얀이 권세를 휘두르면서 토곤테무르 칸은 이를 참지 못했는데, 토크토아는 메르키트 바얀에게 은혜를 느끼면서도 그가 실각하면 자신도 위태로울 것이라 생각해 스승인 오직방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대의는 부모를 죽이고, 대부는 국가에 대한 충절이 제1의 의가 된다는 말을 듣고 메르키트 바얀을 타도하기로 결정했다. 토크토아는 토곤테무르 칸을 찾아가 메르키트 바얀에 대해 공이 높다고 교만해서야 되겠냐면서 그에 대해 반대할 뜻을 이야기했는데, 토곤 테무르 칸은 그가 메르키트 바얀의 조카이기에 의심했고, 아버지 마자르타이에게도 메르키트 바얀을 제거할 뜻을 밝혔다. 토곤테무르 칸의 신하인 세걸반, 아루 등에게 그 뜻을 이야기하고, 1340년에 그 두 사람과 함께 메르키트 바얀이 사냥을 나간 틈을 타 추방시키는데 성공했다. 1341년에 [[승상]]이 되어 [[몽골인]]만 우위로 두는 제도를 고쳐 과거를 부활시켰고, 1343년 2월부터 1345년 10월까지 《[[송사]]》, 《[[요사]]》, 《[[금사]]》 등을 편찬했으며, 1344년에 사직했다가 1347년에 부친인 마자르타이가 감숙으로 좌천되자 따라갔고, 부친이 그해에 죽자 대도로 귀환했다. 1349년에 재상에 복귀했고, 1350년에 설철독의 헌책에 따라 재정 파탄을 타개하기 위해 새 지폐인 지정교초(至正交鈔)를 발행했지만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조장하는 결과만 초래했다.[* 원나라의 교초는 은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유통되는 태환지폐였는데 페스트로 인해 실크로드의 무역망이 개발살나서 은이 유통되지 않으니 교초의 가치도 자연스럽게 하락하게 된 것이었다.] 1351년에는 황하의 치수 공사에 착수했고, 가로를 공부상서에 임명해 공사는 성공을 거뒀지만 이 공사는 백성들이 많이 투입되어 불만을 낳았으며, 5월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에센테무르에게 10여만 명의 대군을 주어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처음에 우세하다가 나중에 패배하면서 에센테무르가 대도로 소환되어 12명의 감찰어사로부터 탄핵당하자 토크토아는 이 어사들을 좌천시켰다. 1352년에는 스스로 병력을 이끌고 유복통, 지마리가 이끄는 홍건군을 공격하기 위해 원래 있던 병력과 2만명의 군사를 모은 것을 합쳐 9일 만에 서주에 이르러 공격했으며, 이이 등이 맞서자 철령전을 사용해 격파했고, 다음 날에도 서주를 공격해 함락했지만 병사들이 서주의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1354년에는 제왕에 봉해졌고, 제군에 임명되면서 서역의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원나라는 이 장사성 정벌군을 800만이라고 과장을 심하게 치며 대군을 보내는데, 그 정도로 토크토아는 [[장사성]] 토벌에 공을 들여 서역의 수많은 국가와 동방의 고려[* 이때 참전한 장수 중 하나가 [[최영]]이었다.]군까지 동원해 끝없이 많은 병력을 규합하여 휘하에 편입시켰으며, 고우로 가던 중에 궐리에서 공자, 추현에서 맹자에게 제사를 지냈다. 11월에 장사성의 세력을 상대로 연전연승해 군사를 나누어 육합을 공략하고, 장사성을 항복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이렇게 많은 대군을 동원한 것은 그저 장사성이라는 도적 하나를 처치하기 위한 행동이 아닌 천하의 민심을 돌보는 작업에 나섰던 셈이었다. 토크토아에게 있어 장사성 따위는 대수롭지 않았다. 중요한 건 반군을 제압하고 놀라고 들뜬 민심을 다독여 동요를 막아 세상을 안정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간신 [[간신#s-3.4|카마]]의 모함을 받아 사령관에서 해임되었고, 대도로 돌아간 후 [[탄핵]]을 받아 좌천되었으며, 운남의 대리로 가던 도중에 독살당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토크토아의 실각 이후 원나라의 군대는 어처구니 없이 궤멸되었다. --탈탈을 버린 대가로 원나라는 그야말로 탈탈 털렸다.-- 이 패배 이후 원나라는 다시 대군을 조직할 여력이 없어져 [[한족]] 반란군의 공격에 수세로 일관하게 되었고, [[몽골 제국]]은 이로부터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는 2년 뒤 [[공민왕]]의 반원운동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시 고려는 중앙의 정예군 2,000명을 비롯, 대도의 고려인들까지 포함시켜 23,000명의 군대를 장사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파견했다. 이 패배 이후 원정에 참여한 유탁, 염제신을 비롯하여 [[최영]] 등 수많은 [[고려]] 장군들과 병사들이 고려로 복귀해 이런 원나라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알렸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토크토아의 어처구니 없는 해임이 아니었다면 몽골 제국의 붕괴는 수십 년 후로 미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명장]] [[차칸테무르]]의 분전 때문에 원나라는 토크토아 이후 10년을 더 버티다가 차칸테무르 사후 급격하게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혜종(원)|원혜종]]은 궁녀들과 놀아나며 사치와 향락만 일삼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