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통일민주당 (문단 편집) == 지지층 == 1987년 대선 후 한국갤럽이 조사한 예상 득표율 자료를 인용한 분석 [[https://www.chogabje.com/board/print.asp?c_idx=10346&c_cc=AA|기사]]에 따르면 20~30대와 [[대학생]], 화이트 칼라 및 고소득층의 지지율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전에는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1위라고 나와있었는데 해당 갤럽 자료에서 해당 종교 신자들에게 1위를 받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후보는 김대중 후보였다. 김영삼 후보는 매우 근소한 차이로 2위, 노태우 후보가 3위.] 지역구도로 봤을 때는, 양김 분열 후에 [[김영삼]]과 [[상도동계]]가 주축이 된만큼 PK 지역, 즉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가 주요 지지 기반이었다. 부산이 한때 '''야도(野都)'''였다는 말은 민자당에 흡수된 [[3당 합당]] 전까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학생 시위도 마산과 부산에서 시작됐으며 [[부마민주항쟁]]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6월 항쟁]] 때도 서울과 함께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곳이었다.][* 한편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는 그 이후 30년 정도 뒤에 치른 선거인 [[제19대 대통령 선거]]와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다시 야도(野都)의 모습을 보여줬고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의외로 민주당세가 어느정도 있는 지역임이 드러났지만, 그 이후에 [[2021년 재보궐선거]] 부터는 알다시피 다시 보수우위 지역으로 돌아가고야 말았다.]라고 보면 된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곳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 의외로 노태우가 부산, 경남지역에서도 30~40%의 득표율을 올려 크게 선전하였다. 또 [[전두환]]의 고향인 [[합천]] 등 서부 경남지역에서는 노태우가 아예 1위를 차지한 곳도 있었다.[* 사실 서부경남은 대구광역시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통일민주당세가 약한 지역이 많았으며, 특히 서북부 지역은 말 그대로 TK 그 자체였다.] [[김대중]] 측에서도 [[4자필승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근거가 김영삼이 고향인 PK에서 70% 이상 압도적인 득표율을 올리는 것이었지만 노태우가 이곳에서 표를 잠식시키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다.]을 올렸으며 다음 해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부산에서는 [[금정구]], '''단 1석'''을 제외[* 당시 부산에서 유일하게 민정당 후보가 당선된 곳이 바로 금정구. 가장 영향력 있는 지역 유지인 동일고무벨트 회장 [[김진재]]가 민주당 바람을 뚫고 2위인 이대우 통일민주당 후보에게 1,800여 표차로 신승했다. 워낙 지역기반이 탄탄하게 다져놓아 나중에는 아들인 [[김세연(정치인)|김세연]]에게도 지역구를 물려줬다.]하고 싹쓸이 했는데 당시 부산, 경남에 출마한 인물들로는 [[김영삼]]을 비롯하여 [[노무현]], [[김광일]], [[서석재]], [[최형우(정치인)|최형우]], [[신상우]], [[이기택]], [[황낙주]], [[김덕룡]], [[강삼재]], [[김동영(정치인)|김동영]] 등 당의 간판급 인물들이었다. [[경상남도]] 중에서도 대도시인 [[마산시|마]][[창원시|창]][[진해구|진]]과 [[진주시|진주]] 그리고 김영삼의 고향인 [[거제시|거제군]] 정도가 대표적인 지역 기반이었다. 공업, 산업 도시에 젊은 층들이 많이 살고 있는 영향도 있던 셈. 다만 서부 경남지역(특히 대구와 가까워 대구권이라고 불리는 [[창녕군]], [[합천군]] 등)은 민정당 우세 지역들도 많았고, 군사 정권 시절 경제 개발의 덕을 봤던 [[울산광역시|울산]]도 민정당세가 강한 지역이었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당시 [[강남구]]와 [[서초구]] 일대로, [[1988년]]에 각각 분구되었다.], [[강동구]][* 당시 [[강동구]]와 [[송파구]] 일대로, [[1988년]]에 각각 분구되었다.] 등 [[중산층]] 거주 지역도 우세지역이었다. [[강남3구]], 강동구 일부와 당시 새로 개발된 [[목동(서울)|목동]], [[과천시]] 등 대규모 [[아파트]] 주거 지역이 거의 김영삼 우세 지역이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도 [[서울특별시]] 대부분 지역에서는 [[김대중]], 경기도에서는 노태우가 앞섰으며,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때도 [[평화민주당]] 바람이 불었지만[* 물론 서울에서도 김대중이 큰 표차로 앞선 곳이 아니라 많아야 3% 차이로 앞섰을 뿐이었다. 단 총선 때는 평민당 의석수와 득표율이 전부 앞섰다.], 강남권에서만큼은 김영삼과 통일민주당 지지세가 타 지역에 비해 더 높았다. 이 지역에 주로 거주하던 중산층 이상 계층 및 고학력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해당 지역은 [[전라도]]나 [[충청도]] 등지에서 상경한 주민들이 많은 서울 타 지역보다는 상대적으로 [[부울경|PK]] 원적자들이 많기는 하나 해당 지역 전라도, 충청도 원적자들의 인구 비중과 비교할 때 선거를 좌우할 만큼 크게 유의미한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 지역이다. 또한 서울 다른 지역에 비해 의외로 서울경기 출신 원적자 비중이 높은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이 당시 선거는 [[경상남도]] 출신 후보와 [[경상북도]] 출신 후보가 동시에 출마했음을 상기하면...][* 이 지역의 투표 결과를 좌우한 요소는 주민들의 출신지나 원적지보다도 계급 투표적 측면이 더욱 강했다. 아래 후술하지만 [[김영삼]]은 화이트칼라, 경제적 상류층에서 지지도 1위를 차지했다. 하기한 갤럽 자료에서, 김영삼은 중산층 이상에게 높은 지지도를 보이고 나머지 [[노태우]]와 [[김대중]], [[김종필]] 후보 지지층은 거의 유사한 소득 계층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지역들은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으로 재편되고 나중에 [[신한국당]]으로 간판을 바꾸면서 '''자연스럽게 보수 강세 지역'''이 되었다.[* 예를 들어 88년에 통일민주당 당적으로 [[서초구]] 을 지역에서 당선된 [[김덕룡]] 의원은 이후 해당 지역에서 보수 정당 간판으로 4선을 더해서 5선까지 한다(...)] 이렇게 강남3구 및 영남지역의 통일민주당 지지층은 결과적으로 보수화가 진행되며 전체 보수진영의 지지층이 되었고, 2000년대와 2010년대에 걸쳐서 상당기간 동안 1940년대와 50년대생의 보수정당 지지율이 60%대를 넘나들게 하는데 기여를 하게 된다.[* 물론 2020년대 현재는 이들도 벌써 70대이기에, 호남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도 보수정당 지지율이 기본적으로 60%를 넘는다.] 그나마 이 즈음에 청년층과 외지인의 영향으로 어느정도 보수세가 희석되었을 뿐이지, 이들 세대에서의 보수 강세는 2020년대 현재도 유효하다. 다만 3당 합당이 이뤄지기 전에도 김영삼의 지지층은 보수 쪽에 훨씬 더 가까운 편이었다. 비록 노태우와 김영삼은 각각 군부정권의 후신과 민주화운동가로서 서로 정치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보수주의자이고, 양측의 지지층 또한 이념적 동질성이 크다는 것이 사실이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투표자 조사를 실시한 [[한국갤럽]]의 대표 [[박무익]] 소장은 "여론조사를 해보니 우리 사회에 '''보수온건세력'''이 놀라울 정도로 두텁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도 65%쯤 될 것인데, 이것은 '''노태우 김영삼의 공동표밭'''이기도 하다. 그동안 역대 정권이 이룩한 경제성장의 영향을 양김씨는 과소평가한 것 같다. 김영삼 씨는 너무 군정종식론에만 치중했고 집권능력을 확신시켜 주는 데 실패했다."라고 분석했다. [[https://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10346&C_CC=AA|#]] 즉 김영삼 지지층은 노태우 지지층과 함께 보수온건세력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김대중의 지지층과는 상당히 이념적으로 괴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김영삼의 지지층이 김대중의 지지층과 민주화라는 명분으로 뭉치기는 했었지만, 이념적으로 분류했을 때는 물과 기름같은 관계이고, 오히려 노태우의 지지층과 화학적 결합의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예측은 [[3당 합당|실현되었다.]] 단, 그렇다고 통일민주당 지지층이 죄다 민주자유당-신한국당 한나라당 지지로 환원된 것은 아니었다. 우선 [[1991년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이 야권분열과 투표율 저조로 대승을 거두웠음에도 득표율이 40%에 그쳤고, 꼬마민주당이 14%의 득표율을 기록했으며 이는 [[제14대 국회의원 선거|1992년 총선]], [[제14대 대통령 선거|1992년 대선]],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1995년 지방선거]], [[제15대 국회의원 선거|1996년 총선]]에 까지 일관적으로 이어진다. 또한 1990년대 선거 여론조사 결과를 상세히 보면 이 당시의 20대와 30대에서 민자당과 신한국당의 지지율이 일괄적으로 낮은 흐름을 보였는데 이를 통해 알수있는 점은 3당 합당 이전에는 야당 대표로 김영삼을 지지했던 수도권의 통일민주당 지지층들 가운데 상당수가 3당 합당에 대한 실망감으로 DJ계 민주당이나 아니면 [[꼬마민주당]], [[통일국민당]], [[신정치개혁당]], [[통합민주당(1995년)]]으로 전환하는 흐름이 있었다는 점이고, 이는 강남 3구도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에[* 강남3구의 경우에는 1990년대 초중반 당시에는 캐스팅보트 지역으로 손꼽혔다. 물론 그 이후 보수화 되었긴 하지만, 대구경북마냥 압도적이진 않고 30%대 초반 ~ 40%대 초반 정도의 민주당 지지세가 남아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90년 민정당과 민주당의 합당은 전통적인 보수 정당과 온건 보수 정당의 연합의 성격을 지닌다. 실제로 김영삼의 지지층에는 분명 급진 개혁 세력도 존재하였으나 대체로 온건한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이 중심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정당과 김영삼씨의 연합은 넓은 의미에서의 보수 블록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두 당의 전통적 지지세력이었던 영남 지역에서의 지지층 확대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