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통일신라 (문단 편집) === [[만주]] 영토 상실 논란 === [[고구려]] 북부였던 만주 영토를 한국사에서 제외시켰다는 이유로 학계에서도 불완전한 통일이라고 보는 부정적인 의견도 많다. 그러나 이것은 신라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라기 보다는 '''통일신라'''라는 말처럼 '''"신라의 삼국통일을 과연 통일이라고 볼 수 있는 가?"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평가에 가깝다'''. 다만 이 부분은 발해가 있어서 미묘한 편이기도 하다. 고구려 북부 영토는 [[발해]]가 대부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만주가 한국사에서 거의 이탈한 것은 발해의 멸망 및 부흥운동 소멸 이후인데 그 과정에서 신라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신라와 발해 사이에는 외교적 갈등 외에 거대한 군사적 충돌을 찾아보긴 어렵다. 신라는 통일을 하면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영토를 상실했지만 고려시대에 한반도 북부를 거의 수복하며 북원이 점령 중인 [[요동 정벌]]때 잠깐 동안 요동을 점령하고 후퇴하고 이후 만주는 포기했다.[* 당시 고려의 상황이 매우 안좋았다. 고려말이었기에 국가 재정이 파탄에 이르고 민생이 피폐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무리하게 요동 정벌 후 결국 요동을 차지하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았기에 포기한 것이다. 전쟁을 하려면 병사, 식량, 무기, 갑옷 등 정말 많은 것이 필요하다.][* [[위화도 회군]] 역시 설령 이성계의 활약으로 당장은 요동을 수복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한계에 다다른 고려의 국력으로는 머지않아 또 빼앗겨서 아무 의미 없어질것이 너무 뻔히 보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현대인 지금에도 만주를 포기한 것은 상당히 현명한 선택으로 볼 수 도 있는데, 만주를 점령하는 것은 지리적으로 전쟁이 자주 발생하기에 적이 너무 많다. 중국, 몽골, 만주족, 일본 등. 전쟁중에 일본까지 한반도로 침략하면 정말 최악이다. 반면 한반도는 산지가 많기에[* 고지대는 저지대 상대로 관측이나 공성전 방어에 매우 유리하다.] 산성에서 방어하기 매우 좋다. 실제로 당나라가 남은 한반도를 차지하려고 기벌포 전투와 매소성 전투로 잘 알려져있는데 이둘을 합쳐서 한반도에서 당나라와 40번 이상 싸웠다. 역사적으로 고조선, 고구려, 발해는 한, 당, 거란에 의해 멸망했고, 중국도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정신 없는데, 동남아 국가(미얀마, 베트남 등)나 북방유목민족, 중앙아시아 국가([[돌궐]])에게 공격을 당했다. 결국 중국대륙과 유럽 일부도 원나라에 점령당할 정도였다. 이후 만주에서 [[만주 전략 공세 작전]],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일본군, 중국군, 러시아군이 싸우는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고대세계에서도 통일은 정복국가의 영토를 흡수하는 것과 함께 왕족과 천명 등 명분론적 정통성의 확보도 중요했다. 같은 맥락으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왕족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는데 있어서 명분이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신라는 미약하나마 고구려인이 직접 추대한 [[안승]]과 [[보덕국]]은 흡수했다고 하지만 백제의 핵심 요인들 상당수는 당나라로 끌려가거나 백제부흥운동을 전후로 일본으로 망명하는 등 적극적으로 이들을 흡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왕족들을 비롯한 백제의 지배층 대다수는 신라에 편입되었다.] 백제 구 지배층 중 신라에 몸 담아 기록에 남아있는 사람 중 가장 높은 사람은 [[충상]]과 [[상영]]인데, 이 둘은 높게 잡아도 방계 왕족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대신 신라는 백제 승려 [[경흥]]을 나라의 어른(國老)으로 임명하고 [[미륵사]]나 [[왕궁리 유적|왕궁리의 절]], [[제석사]] 같은 백제의 초대형 왕실 사찰을 백제 멸망 후에도 계속 운영하는 등 백제 불교 위주로 회유한 정황이 나타난다. 또한 영토에 관해서는 신라가 백제의 고지를 전부 차지한 반면, 고구려의 실질적인 수도권이자 핵심 영토인 패서(浿西)[* 오늘날의 행정구역에 따르면 [[황해도]] 전체와 [[평안남도]] 일부, [[함경남도]] 일부까지 군현을 설치했다.]는 성공적으로 점유했어도 고구려의 또 다른 인구 밀집지이기도 했던 [[국내성]] 일대, [[책성]] 일대, 그리고 [[요동]]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고지(古地)들은 훗날 [[발해]]가 점유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곳의 인구도 흡수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고구려부흥운동]]과 [[나당전쟁]] 당시 상당수의 인구가 [[신라]], [[중원]]으로 유출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현재 신라의 통일은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고[* 최근 들어 학계 신진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신라의 통일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고려]]가 민족적인 측면에서 재통일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고려는 엄연히 고구려계 호족들이 분열된 신라 땅을 다시 통합하고 고구려라는 기치 아래 옛 고구려의 영토까지 회복했다는 점도 통일국가라는 요소에 긍정적으로 직용하고 있다. 다만 [[신채호]] 처럼 민족주의자들 경우에는 통일이 현대까지 한 번도 된 적이 없다며 이와 같은 지적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통일국가 대신 단일국가라는 명칭으로 부르자는 견해도 종종 나오고 있는 편이다. 사실 고구려를 살피면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남쪽으로 영토를 팽창하며 획득한 이들을 한인(韓人)과 예인(穢人)이라 지칭하고 있고 [[충주 고구려비]]에는 신라를 동이 매금이라 여기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여와 비슷하며 예국과 옥저는 고구려와 비슷하지만 한(韓)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특정 시각과 달리 서로 다르게 봤다는 여지가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당시 신라는 [[삼한일통]]을 주장하긴 하였으나 고구려의 나머지 영토를 정복하는데 소극적인 편이었다.[* [[나당전쟁]] 당시 요동 일대인 개돈양을 먼저 공격해서 일시적으로 점유하는 등 마냥 소극적으로 나간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당나라]]를 상대로 벌여야 하는 총력전이라는 현실적인 조건 때문에 정복을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에 가깝다.] 특히 당시 신라인들은 통일 전쟁 후 자신들이 더 거대해졌다고 생각했지 결코 작아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치원은 지증대사비에서 고구려를 작은 나라로 비유하고 <사불허북국거상표>에서 발해를 고구려의 방계로 조롱했으며, 《삼국유사》나 《제왕운기》마저도 발해를 고구려에 부속된 말갈로 여겼다. 일본의 《자각국사입당구법순례행기》를 보면 신라 승려들이 매년 8월 15일에 발해에 대한 신라의 옛 승리[* 신라인들은 삼한통일에서 발해를 찬밥 취급했지만 동시에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 비슷하게 여겼다. 물론 정통성 논란에서는 오랑캐라고 비난했다.]를 기념하기 위해 큰 잔치를 벌인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왕조가 계속해서 통일하고 성장하는 와중에 겨우 한반도에서 나오는 자원과 인구로 옛 고구려 영토를 수복하는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느냐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주구장창 신라탓만 할수는 없다는 변호도 있다. 신라 말고 만주 수복 의지가 있는 왕조가 들어섰다 가정하더라도 중국과의 물리적인 차이를 극복하고 만주를 계속해서 통치할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다. 신라는 [[나당연합]]과 [[나당전쟁]] 과정에서 중국 통일왕조가 얼마나 강대한지 확실히 느꼈다. 사실 신라 이전에 그 고구려조차도 중국 통일 왕조와는 웬만하면 충돌을 피하려 했었으며 그 평양을 가지고 있었다던 고구려가 멸망한 큰 원인도 중국과 자주 충돌하면서 그 피해가 축적된 것을 생각하면 신라의 의지 이전에 한반도 지역에서 끌어올 수 있는 역량의 한계점에 도달한것으로 보는게 맞다는 것이다. 내부 문제가 많았던 신라의 사정은 둘째치고, 그 이후 건국된 [[태봉]], [[고려]], [[조선]]도 결국 만주에 제대로 진출하지 못했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된다.[* 다만 [[고려]]의 경우 [[공민왕]] 대에 [[지용수]], [[이성계]]을 필두로 단행한 [[요동 정벌]]로 일시적으로 고구려와 발해의 옛 영토인 [[요동]]을 탈환하기도 했으며, 그 이전인 [[문종(고려)|문종]] ~ [[숙종(고려)|숙종]] 대에는 여진족 회유나 여진 정벌 등을 통해서 동쪽 변경의 간접 통치 영토를 크게 넓히기도 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비판을 받는 핵심 이유는 단순히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고구려 영토를 완전히 흡수했지 못했다가 아니라, 그 통일을 '외세를 끌어들여' 이루었고, 그 과정에서 삼국 중 고구려의 핵심 역량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한 채 사실상 외세에 의해 상실하고 이를 복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라가 흡수할 수 있었던 고구려의 자산은 [[보덕국]]과 [[패서]] 지역의 유민집단, [[고구려부흥운동|고구려 부흥운동 세력]], 그리고 [[요동]]과 책성 등 동만주 일대에서 남하한 집단들이었다. 물론 신라 입장에서야 대박 수준의 하이리턴이라고 할만 했겠지만, [[평양성]] • [[국내성]] • 책성 등의 핵심 인적자원이나 인프라를 전부 흡수하지 못한데다 [[한성]]과 [[패서]]에서 흡수한 인적 자원들이 신라의 국가운영에 제대로 활용된 것도 아니었으니 한국사 전체로 보면 그야말로 소탐대실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수준의 로우리턴이었다. 물론 신라는 거의 온전하게 흡수된 [[백제]]의 지배층도 제대로 활용할 생각이 없었고 쭈욱 [[골품제]]에 따라 발 아래에 두려고 했다.] 이 문제에서 고구려가 어차피 중원 왕조들과의 충돌로 망할 운명이었다거나 하는 가정은 무의미할뿐더러, 실제로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행보를 보면 그 가정의 설득력도 그다지 높지는 않다. 당은 총력을 기울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토번 등 서역전역이 열려 당이 동쪽에 신경을 쓸 여력을 상실하고 신라의 북진과 발해의 건국을 용인하며 결국 무왕대 이후 멸망하는 그 날까지 만주에 대한 무력투사를 재시도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고구려보다 명백히 체급이 떨어지는 신라 역시 계림도독부 취급하며 아예 병탄하려 들기까지 했지만 결국 [[나당전쟁]]은 신라가 별 다른 외부 동맹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 한반도 내의 자원을 동원하여 격퇴하고 국체를 보전할 수 있었다. 물론 신라의 입장에서는 나당동맹을 위한 삼국통일이 자국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나, 그 결과 후대에 미치는 영향과 그에 대한 평가 역시 선택의 대가로 감내할수밖에 없는 문제다. 허나, 신라가 민족의 생활공간을 실추했다는 해석은 지나치게 현대적인 관점이며, 삼국시대때 자국의 생존을 위해 서로 박터지게 싸웠던 고구려, 신라, 백제 3국이 "서로 같은 한민족이니 외세를 배척하고 나중에는 하나로 합쳐져 한민족의 생활권을 지키는것이 옳다"는 인식을 가졌어야 한다는것 역시 현대인의 무리하고 오만한 주장일 뿐이다. 당장 현대에 이르러서도 한반도는 [[대한민국|두개]] [[북한|나라]]로 쪼개져 있으며, 두 나라 모두 [[미국|외세를]] [[중국|끌어들이고]] [[러시아|있다]]. 더군다나 이 두 나라는 옛날 삼국시대와 달리 수시로 전쟁을 벌이는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연 양국의 감정이 서로 동질감을 느낄만큼 좋다고 할수 있는가? 라는것 또한 역지사지로 생각해봐야할 문제이다. 삼국시대에 비하자면 건국시기에 딱 한번 전쟁했고, 분단이후 '겨우' 100년도 안지난 시점인데 '벌써' 현실에 지쳐서 통일을 포기하자거나 서로 같은 민족임을 부정하는 여타 과격한 여론들도 생겨날 정도이다. 한민족의 개념이 명백하게 들어선 지금에 와서도 이런데 삼국시대에는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낄수도 없었던것이 당연하다. 삼한일통도 어디까지나 마지막 살아남은 국가인 신라가 자신의 치적을 나타내기 위해, 그리고 몇몇 이득을 위해 사용한 단어에 가깝다. 당시 신라는 어디까지나 경상권에 국한되어있던 남부의 국가였고, 백제를 합병하고 평양 유역까지 진출한 것 만으로도 신라인들의 관점에선 국력상 감당키 벅찰 정도로 괄목할 수준의 국토팽창을 일군 것이며, 당연히 자신들의 옛 영역도 아닌 고구려땅까지 진출할 이유는 없는 것이 자연스럽다. 삼한일통 의식은 어디까지나 고구려 유민들이란 인적자산을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무한겁 끌어쓰기 위한 유인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사에는 통일 신라와 함께 병존하다 거란의 등빨에 밀려 만주에서 축출당한 발해왕조와, 발해유민 흡수 후 만주로 재진출 하려다 여진의 등빨에 밀려 좌절당한 고려왕조가 존재한다. '''만주 고토의 상실에 대한 안타까움은 당연히 만주와 아무 인연이 없는 통일신라 파트에서가 아닌, 고구려의 직계 후예들인 발해사와 고려사 파트에서 느껴지는 것이 합당한 해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에도 한국인들이 느끼는 만주땅의 상실에 대한 비판이 사그라들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신라의 국력의 한계도 명확하다는 증거이기도 한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