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통일신라 (문단 편집) == 화려한 불교 문화 == [[불교]] 문화가 크게 번성했다. 이 시기에 많은 불교 문화재의 걸작이 만들어져 지금도 다수가 남아있는데, 뒤를 계승한 [[고려]]가 불교 문화에 있어서 규모나 질적인 수준에 있어서 오히려 통일신라에 비해 뒤떨어지는 부분이 있을 정도다.[* 물론 고려의 근본은 지방 세력인 호족의 연합 정권이었기 때문에 지방색이 신라에 비해서 강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특히 신라 시대가 다른 한국사의 시대와 비교되는 것이 [[불상]]의 완성도인데, [[석굴암]] 본존의 조형미나 크기는 한국 불상의 정점에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불국사]]와 [[석굴암]] 등 신라와 한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불교 유산들과 명승 고찰이 대부분 통일신라 시기에 완성되었다. 물론 고려도 신라 못지 않은 불교 국가여서 왕자가 [[승려]]가 되는 것이 비일비재했을뿐더러 이 시기에도 [[흥왕사]] [[보제사]] 같은 거찰이 많이 세워졌고, 기존에 있던 [[황룡사]] 같은 신라 거찰들도 후기에 외적이 침입하기 전까지는 관리를 받으며 잘 번성했다. 그러나 신라와 달리 [[교종]]과 [[선종(불교)|선종]]의 대립 탓에 신라처럼 수도의 왕실이 불교계를 적극적으로 선도하는 입장은 못 되었고, 전국에서 비슷한 경주 스타일 표준형식 불상과 탑이 지어지는 통일신라와 달리 고려에서는 [[호족(한국사)|호족]] 등 지방 세력의 지분이 커서 파주 용미리 불상, 논산 [[은진미륵]] 등 투박하고 개성적인 형식의 불상이 많이 만들어졌고, 신라의 사실적이고 각 잡힌 불교미술과 비교당하는 측면이 있다. 다만 고려가 통일신라보다 역사가 2세기 더 길고 더 후대 왕조인만큼 남아있는 유물의 양은 고려가 더 많다. 신라는 통일 직후 새로 편입된 땅의 변방에 큰 절을 세우면서 [[불교]] 보급과 점령지의 민심 교화를 시도했고 또한 국방상의 기지 확보까지 꾀했다. 그 예가 의상대사의 화엄10찰 창건이다. 덕분에 원래 [[백제]] 영역이던 서남부 지역에도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이나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처럼 전형적인 통일신라식 3층석탑이 세워졌고, 지금은 [[북한]]령인 [[금강산]]처럼 신라의 중심지에서 거리가 먼 지역에도 정양사 삼층석탑처럼 전형적인 통일신라식 3층석탑 유물이 많이 남아있는 등 신라 중심지에 질적으로 떨어지지 않는 문화가 전파되었다. 통일신라 초기에는 이전 중고기와 달리 [[화엄종]]을 밀어주었다. 중국에서 화엄학을 유학하고 돌아온 [[의상(신라)|의상]]의 화엄사상을 잘 나타내주는 《화엄일승법계도》에 따르면 우주의 다양한 현상이 결국 하나라고 하며 이는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뒷받침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오악|신라의 5악]]을 위시한 전국 각지 명산에 화엄 계통의 사찰을 세웠는데, 유명한 것이 [[가야산]] [[해인사]], [[지리산]] [[화엄사]] 등 열 곳이라 이들을 '화엄 10찰'이라고 한다. 9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선종불교가 도입되었고, 선종의 개인주의적 경향은 지방 호족세력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풍수지리]] 또한 이 때에 [[도선]] 등에 의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도입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