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통일신라 (문단 편집) == 경제와 활발한 대외관계 == [include(틀:신라의 대외관계)]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apture+_2018-03-28-07-44-36-1.png|width=100%]]}}}|| || ▲[[아랍인]]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유럽에서 작성한 세계지도.[* 참고로 이 지도는 남쪽이 위로 가게 만들어서 신라가 좌측 끝에 있다.] || >중국의 저쪽, 깐수의 맞은 편에 산이 많고 왕이 많은 한 나라가 있는데, [[신라]]라고 불린다. 그곳에는 [[금]]이 풍부하다. 그곳에 간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료되어 영구 정착한다. >- [[페르시아인]] 이븐 쿠르다드비, 《도로와 왕국 총람》 >중국 해안의 맞은편은 [[신라]]와 그 부속 도서들을 제외하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라크]]인과 기타 외국인들이 정착하여 그곳을 [[조국]]으로 삼았다. 그들은 깨끗한 물, 비옥한 토지, 이익과 수입의 증대, 광물질과 보석류의 풍부함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곳을 떠난 자는 극소수다. >- 이라크인 마수디, 《황금 초원과 보석 광산》 [[http://archive.org/details/lesprairiesdor01masduoft/page/346/mode/2up?view=theater&q=Beyond|프랑스어-아랍어 대역 346쪽]] [[https://archive.org/details/historicalencycl00masrich/page/358/mode/2up?view=theater&q=%22beyond+the+coast%22|영문판 358쪽]] >[[신라]]는 유쾌한 나라다. 중국의 가장 끝자리에 위치한다. 공기가 맑고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기에 사람들은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하길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이 난다고 한다. 전염병과 다른 병은 물론 드물고 파리와 야생동물 또한 거의 없다. 다른 지역의 어떤 환자도 이곳에 오면 치유된다. 모함마드 자카리야 라지는 "누구나 이 땅에 들어가면 살기 좋으므로 정착해 떠나려 하지 않는데 그건 자원과 금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로지 하나님([[알라]])만이 그 진실을 안다. >- [[https://en.m.wikipedia.org/wiki/Zakariya_al-Qazwini|자카리야 카즈위니]], 《나라들이 남긴 발자취》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41107.010340757410001|기타 중근동 문헌들의 신라 관련 기록들]][* 여담으로 중근동 쪽 문헌에서는 이미 [[고려시대]]로 접어든 [[중세]] [[11세기]]까지도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당시 정보나 교통은 현대 같지 않았다 보니 새로운 왕조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했거나, 혹은 알면서도 과거부터 이미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표기했던 듯 하다. 사실 [[조선시대]]에도 외국에서 '[[고려]]'라는 명칭을 쓰는 등의 일이 있었고, 멀리 떨어진 아랍도 아니라 가까운 [[일본]]이나 [[여진족]]에 심지어 [[19세기]] 이양선을 타고 오는 서구 열강까지 고려란 표기를 쓰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일은 꽤 흔했던 듯하다.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한국의 영어명 [[코리아]] 자체가 이미 고려를 어원으로 한다.] [[세계]]와의 무역도 활발했으며[* 당나라, 발해, 일본은 물론이고 심지어 멀리 [[아라비아]] [[상인]]도 왔다. 이는 당이 다른 중국 통일 왕조보다 더 개방적인 성향이었던 탓도 크다. 반대로 조선이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해외 교류가 거의 없었던 것도 명이 폐쇄적인 성향이었기 때문이 큼.] [[장보고]]가 [[한중일]]을 연결하는 허브 기지로서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일대에 [[청해진]]을 건설하여 해상을 장악한 시기도 이 때. 진정 [[아시아]]의 [[이탈리아]]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장보고나 [[신라삼최]], [[혜초]]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유학]] 등 국제 인적 교류도 상당히 활발했다. 신라 정부도 유학생의 책값과 체류비를 지원하고 유학 경력자가 귀국하면 관리로 특별 채용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연안항해를 하지 않고 [[당나라]] 적산포에서 [[충청남도]] 해안까지 이틀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주변의 국제 정세가 당, 일본, 발해로 정립되어 자리잡고 있던 데다 신라 자체의 [[군사력]]도 상당했었기에 200여 년 동안 외적의 침입도 흔치 않았다. 사실 당과 일본 모두 삼국통일 전후 혼란기에는 한반도로 병력을 보내 집적거리긴 했지만 이내 [[역관광]]당했고, 통일 뒤 통일신라가 완전한 안정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국가적인 공격 기도를 멈췄다. 특히 일본의 경우 [[사이메이 덴노]] ~ [[덴지 덴노]]의 시기에 멸망한 백제를 돕겠답시고 대규모 군사를 내어 한반도로 보냈다가 [[백강 전투|싹 날려먹는 병크]]로 나라가 뒤집힐 지경이었고 이후 8세기에도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이 추진됐으나 이는 [[임진왜란]]과 같이 내부적불만을 외부로 표출하는것이었고, [[발해]] 또한 무리한 것을 알기 때문에 결국, [[발해]]의 도움을 얻는 데 실패하면서 끝내 당시 최강 국력을 자랑하던 통일 직후의 전성기 [[신라]]를 건드리지는 못했다. 아마도 실행했다면 사이메이 덴노 시즌 2 확정.[* [[신라]]에 대한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이후 당은 주로 서쪽 [[토번]], [[일본]]은 동북방의 [[아이누]]족과 대치 국면에 들어갔다. 토번은 [[송첸캄포]] 대왕 때 크게 성장하여 안 그래도 한반도 쪽에 신경 쓰느라 바쁜 당을 털어버렸다. 덕분에 신라는 [[나당전쟁]]을 승리로 빠르게 당나라 세력을 몰아냈다. 그리고 토번은 당이 막장 테크를 타자 당의 수도인 장안까지 털어버린다.] 오히려 신라에서 일본을 정벌하러 올까봐 두려워했다는 당대 정황도 나타나고 있으며, 실제로 일본측 사서들에서는 신라가 일본을 공격하였다는 기록들도 꽤 나오는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를 참조. [[당나라|당]] 내륙에 신라인의 거점인 [[신라방]]이 구축된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그 외에도 신라관, 신라촌, 신라원, 신라소라 이름 붙은 이 시기의 [[당나라|대당]] 거점이 꽤 많이 있었다. 이는 당대 [[신라]]의 진취성과 [[당나라]]의 [[개방성]]을 모두 보여주는 사례. 뿐만 아니라 [[국수주의]]로 돌아선 [[헤이안 시대]] [[일본]]에조차도 견신라사(遣新羅使)가 오가면서 교류가 꽤 있었기에 통일신라의 영향을 받은 [[문화재]]가 꽤 많으며[* 헤이안 시대의 경총(經塚)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의 금동불입상이 대표적이다. [[덴무 덴노]] 시절에 제정된 팔색성(야쿠사노가바네)이라는 씨성제가 '''신라의 골품 제도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심지어 적성국으로 출발한 [[발해]]와도 후대에 교역을 트면서 <상경 → 동경 → 남경> 루트를 거쳐 금성까지 연결하는 '''신라도'''라는 무역로가 개척되기도 했다.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당대 가탐의 저서에 따르면 발해의 동경이 있었던 책성부[* 지금의 중국 길림성 훈춘.]에서 신라 북쪽 천정군[* 지금의 북한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면.]까지의 사이에 39개의 역(驛)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융성하여 당시 기록에 따르면 수도 [[금성]](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에서는 비가 오는 날 가가호호의 처마 밑만 따라 걸어도 비 한방울도 맞지 않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고 할 정도. 말기인 [[헌강왕]] 때에 이르면 도성의 민가는 모두 [[기와]]로 덮고 [[숯]]으로 밥을 지었다고 한다. 하긴 그만 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었으니 [[문화]]적 성취가 가능했던 것이겠지만. 다만 모두 수도의 융성함을 드러내는 기록이다 보니 여타 지방의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나말여초 대에의 소설이나 지방에 도로가 이어져있는 것 등을 볼 때 지방 사정도 낙후되거나 방치된 것이 아닌 정돈이 잘 정리 되어있고 서라벌만큼 융성한 것은 맞는 것 같다. 위의 기록에서 보았듯, [[세계사]]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당대 [[아랍]]인, [[페르시아]]인들조차도 신라에 와 보고는 [[고향]]보다 더 살기 좋아서 영구 정착, 아예 눌러앉으려 했다고 그들의 지리서에 기록했다.[* 물론 아무리 부를 많이 쌓았다고 한들 자연환경을 사올수는 없는일이니, 척박한 사막과 황무지 환경이 대부분이었던 중동에서 살다 온대기후의 풍요로운 동아시아의 자연환경을 보면 훨씬 좋아보이는건 당연하다. 그래도 유독 아랍인들의 영구정착지로 신라가 많이 꼽힌것은 다른 나라들보다 부를 쌓기 편하고, 사회 분위기가 이방인에게도 다른 나라보다 좀 더 친화적인 좋은 조건 덕택이었을것이다.] 기록들에서 일관적으로 서술된 내용에 따르면 실제로 정착한 무슬림도 적지 않았던 모양. 위에 첨부된 [[https://en.wikipedia.org/wiki/Muhammad_al-Idrisi#/media/File:TabulaRogeriana_upside-down.jpg|'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에도 신라가 표시돼 있는데, [[아랍인]]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시칠리아 왕국]] 노르만 왕조의 [[루지에로 2세]]의 지원하에 제작했다. 한국이 포함된 최초의 세계지도로, 다만 신라가 [[섬나라]]로 묘사된 오류가 있는데, 멀리서 한국에 오는 사람들은 바다를 항해해서 [[동중국해]]에서 올라와 한국에 상륙했기 때문에 한국의 북쪽으로 가 볼 일이 없어 섬나라로 오해한 것이다. 수백년 뒤 조선을 표시한 유럽 세계지도에서도 조선을 섬나라로 잘못 그린 지도가 상당히 많다. 《[[삼국유사]]》에 용왕의 아들로 나오는 [[처용]]이 사실은 아랍에서 온 인물이었다는 [[정수일]] 선생의 설이 유명하다. 이외에 중세 [[이란]]의 서사시 《[[쿠시나메]]》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 이후 신라로 망명한 페르시아의 왕자와 그의 혼혈 아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내용으로, 현대에 한국에도 알려져서 공연 등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경주시에서 특이한 유리구슬들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경주 황남동 상감 유리구슬, 식리총 상감 유리구슬, 경주 노서리 상감 유리구슬이 그것이다. 영국 런던 고고학연구소의 제임스 랭턴 박사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지역의 고대 펠랑기 구슬과 동일한 제작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적어도 4세기 이전부터 신라인들이 인도네시아 자바 섬 주민들과 직접 교류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그 외에 당나라의 의정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신라 승려 2명이 인도에 가기 위해 배를 타고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을 거쳐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인도네시아에 있었던 스리비자야 왕국을 말하는 것으로, 인도로 오가는 구법순례의 중간 거점으로 인도네시아와 교류가 있었던 근거가 되고 있다. 한국에서 베트남에 대해 기록한 최초 사례는 신라의 문인 최치원의 882년 저작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이다. 《계원필경》의 일부이며, 당시 베트남 역사에 대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신라 승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여행기를 남겼는데 이는 지금도 남아있으며, 기록이 부족한 당시 인도-중앙아시아의 정세를 기록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여행기를 남긴 혜초가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많은 신라 승려들이 인도를 오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당나라의 의정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아리야발마 법사, 혜업 법사, 현태 법사, 현각 법사, 혜륜 선사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두 사람까지 일곱 명의 신라 승려가 인도에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중 현태법사는 중앙아시아 루트를 선택한 혜초와 달리 650년에서 656년 사이에 티베트와 히말라야 산맥, 네팔을 거쳐서 육로로 인도에 갔고, 반면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승려는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를 지나 해로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신라인의 인도 구법순례는 비록 기록이 부족해 완전한 복원은 어렵지만, 이렇게 여러 경로가 개척될 정도로 일회성이 아닌 꾸준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남아시아]]를 지나는 바닷길뿐 아니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로도 꾸준한 교류가 있었다.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부터가 갈 때는 바닷길로, 올 때는 육로로 돌아온 케이스이며, 한편 실크로드 사막 오아시스에 있는 [[세계유산]]인 [[막고굴]] 중 제61굴의 벽면에 새겨진 오대산도(五臺山圖) 그림에는 신라송공사가 그려져 있다. 신라 사신단은 사신, 관원 2명, 통역관, 마부까지 총 5명이며 이들이 중원을 넘어 실크로드의 [[둔황]]까지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막고굴 중 제355굴 벽화에도 [[조우관]]을 쓴 신라인 2명이 그려져 있다. 그 외 신라 주변국에서 견신라사로 파견하여 활봘한 교역을 하였고, 반대로 신라가 견탐라사, 견일본사, 견발해사, 견당사 등을 파견하여 활발하게 교역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