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통합민주당(1995년) (문단 편집) == 후일담 == 이로서 지역구도는 격화 되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보혁 대결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부터 본격화되었다.[* 그나마도 [[노무현]] 후보가 경선에서 패배했다면 인물, 계파, 지역 대결이 계속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부영 등은 한나라당 부총재를 지내고 최고위원에 선출되기도 했으나, DJ vs 반 DJ 구도가 깨지고 대북정책 중심으로 재정렬 되면서 몇 명이 민주당계로 돌아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이부영, 김부겸, 김영춘 등의 "[[독수리 5형제]]". 한나라당이 패배하고 노무현의 탈지역 개혁신당이 구체화 되면서 이들이 대거 참여한 것이다. 이들이 새천년민주당에 참여하는 건 명분상 어려웠기 때문에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여당 분당이 불가피했단 시각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통합민주당계의 합류로 김대중 정권기의 한나라당은 무조건 보수적인 정당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한나라당은 이회창계 + 반 DJ계의 계파 정당, 영남 지역정당에 더 가까웠다. '''도리어 민주당의 의원들이 더 보수적일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민주당의 보수화는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후 시도한 "한나라당 의원 빼오기"나 새천년민주당 창당 과정에서의 "몸집 불리기"로 더욱 심화되었다. 이 시기 한나라당엔 통합민주당 출신으로 [[국가보안법]] 폐지에 찬성하는 인사도 많았다! 2001년에는 국가보안법 문제로 같은 한나라당인 [[김원웅]] 의원과 [[김용갑]] 의원 사이에 고성이 오갔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신한국당과 통합 과정에서 [[이미경(정치인)|이미경]]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은 의원직 상실을 원치 않았는지[* 비례대표직은 타 정당과 합당하거나 출당 조치의 경우에만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으며, 해당 정당에서 자의로 탈당하거나 합당하는 정당이 아닌 다른 정당으로 당적을 옮길 경우 의원직을 상실한다.] [[새정치국민회의]] 등으로 당적을 옮기지 않고 당적을 [[한나라당]]으로 옮기긴 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한나라당에 반감을 가져서 이후 정계 활동 때 당의 노선에 전혀 따르지 않아 '내부의 적'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1999년 [[동티모르]] 평화유지군 파병 동의안에 한나라당이 당 차원에서 반대해 표결 자체를 거부하고 회의장에서 모든 소속 의원들이 퇴장할 때도, 혼자 본회의장에 남아 반대표도 아닌 찬성표를 던졌을 정도. 결국 당에서 출당(제명) 조치되어 무소속 의원으로 남았다가 --바라던 바다!-- 2000년에 [[새천년민주당]]에 도로 입당했다. 의원직에 대한 욕구와 개인의 정치적 소신이 절묘하게 결합해 일어난 일화이다. 참고로 이미경 의원은 민주당에서도 비례대표에 당선되어 16대 의원을 지냈으며 17대부터는 3번 연속으로 서울 [[은평구 갑]]에서 당선되어 현재 5선까지 성공했다. 특히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에서 민주당이 전멸하다시피 했음에도 당선되었다! 그만큼 지역구 관리를 잘하고 있었지만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지역구 관리라면 빼놓을 수 없는 [[정청래]]와 같이-- 컷오프를 당했다. 그 후 컷오프에 승복하고, 해당 지역구에 긴급히 전략공천 된 [[박주민]] 의원에게 은평의 모든 지역 조직을 고스란히 인수인계하고, 막후에서 적극적으로 선거를 지원하여 정치 신인 박주민을 당선시키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래서 박주민 의원이 이미경 전 의원을 깍듯하게 모신다고 한다.] 이런 미담과 19대 대선 때의 문재인 캠프에서의 공로를 인정 받아 [[문재인]] 대통령 당선 후 코이카 이사장으로 영전했다.[* 21대 총선 당시의 나이가 만 70세의 고령인지라 사실상 정계은퇴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개혁성향을 가진 통합민주당의 전국구 의원 6명 중 절반인 3명[* [[이미경(정치인)|이미경]], [[이수인]], [[김홍신]]]이 이런 행보를 보였다. 이수인, 이미경 의원은 1999년 10월 제명되었는데 이미경 의원은 이듬해 [[새천년민주당]] 창당에 합류했고 이수인 의원은 무소속으로 임기를 마쳤다.[* 임기 만료 후 불과 열흘 만에 지병으로 별세. 아마도 자신의 병세가 심각하다고 판단해 사실상 정계은퇴를 결심했던 듯.] 김홍신 의원의 경우는 다소 행보가 복잡했는데, 1998년 3월 '''"거짓말을 하면 염라대왕이 입을 꿰맨다고 했듯이 김대중 대통령에게는 공업용 미싱이 필요하다."'''는 망언을 하는 등의 반DJ 행보로 16대 때도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주요 관심사인 보건복지 분야에 대해서는 정부 정책에 비판적 지지를 보내면서 한나라당 지도부와 차츰 사이가 나빠졌고 [[참여정부]] 출범 후에는 노골적으로 친노 정치인들과 가깝게 지내는 바람에 결국 [[열린우리당]]이 창당된지 2개월만인 2003년 12월 의원직 사퇴 및 탈당을 선언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한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구에 출마했으나 박진 한나라당 의원에게 밀려 낙선하면서 정계를 은퇴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정말 마이너해서 대부분이 모르는데 [[노회찬]]이 1996년 15대 총선을 전후한 시점에 민주당에서 당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민중당(1990년)|민중당]]의 실패 이후에도 진보세력들은 계속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을 주장하면서 각개약진했지만, 정작 대중적 기반은 만들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조직통합을 둘러싼 키배만 뜨는 상황이었다.[* [[PD(정파)|PD]]가 [[NL(정파)|NL]]한테 맨날 밀리는 이유가 이것이다. 막말로 NL은 하다못해 동네 물청소라도 열심히 하면서 지역에서 인심을 얻고 있는데, PD는 맨날 자기들끼리 골방에서 강령토론, 조직노선 토론하느라 시간 보냈다.] 시간은 흘러 15대 총선은 다가오고, 선거출마는 해야겠는데 독자 정당 창당은 힘들고 --돈도 없고, 지역기반도 약하고, 유명인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무소속]]으로 나가자니 그냥 듣보잡 군소후보 취급 당할 꺼 같고, 그래서 노회찬을 중심으로한 일부 진보인사들이 선택한게 통합민주당에 단체로 입당해서 후보로 출마하는 방법이었다. 통합민주당의 개혁적인 이미지와 인지도, 지구당 조직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당무위원 직함을 받고 입당한 노회찬은 통합민주당 서울 [[강서구 을]] 지역구 후보 경선에서 [[고진화]][* 이 사람은 2004년에 와서야 [[한나라당]] 후보로 [[영등포구 갑]] 국회의원에 당선되지만 워낙 정체성이 안 맞아서 4년 후에는 낙천된 것도 모자라 제명당했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제명된 건 아니고 당시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를 지원했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를 꺾고 승리했지만, 정작 사면복권이 되지 않아서 선거 출마는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노회찬은 다른 진보인사들한테 꼼수 부리면서 이상한 짓거리한다고 욕만 먹고, 별 성과없이 선거후에 다시 탈당했다. 함께 입당했던 다른 인사들도 조직력에서 밀리거나, 여러가지 사정이 꼬이면서 정작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건 달랑 1명뿐이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52920491313190|관련기사]] 법률적으로 말하자면 1987년 평화민주당부터 내려오는 민주당계 야당의 연속성은 이 통합민주당에서 끝난다. [[평화민주당]](1987년) → [[신민주연합당]](1991년) → [[민주당(1991년)|민주당]](1991년) → 통합민주당(1995년)으로 쭈욱 내려오다가 1997년 한나라당(1997년)으로 합당(!!)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연속성 때문에 민주당은 당세가 약한데도 불구하고 자기 소유의 당사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전전전신인 평화민주당 시절 은행대출과 열성적인 김대중 지지자들의 모금으로 구입해서 '''평화민주당 김대중''' 이름으로 등기까지 했던 [[서울특별시]] [[마포구]] 용강동의 5층짜리 당사 건물[* 과거 [[신민당(1967년)|신민당]] 별관으로도 사용된 적이 있다.]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창당 당시에는 [[김영도(1929)|김영도]] 의원이 제공한 [[대하빌딩]]을 당사로 사용했었다.] 이 때문에 김대중이 탈당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때, 민주당에서 등기는 김대중으로 되어 있지만, 자연인 김대중이 아니라 평화민주당 김대중이기 때문에 평민당의 후후후신인 자신들의 자산이라는 법률적 해석을 내놨고, 김대중과 [[동교동계]]도 별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교동계의 대변인이었던 [[박지원(1942)|박지원]]은 "오죽하면 우리 돈으로 사들인 50억짜리 건물까지 포기하면서 뛰쳐나가겠냐"[* 실제 김대중의 탈당을 끝까지 반대하던 몇몇 측근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먹히지 않자, 가장 마지막에 꺼낸게 "당사가 아깝지 않습니까"라는 이야기였다고 한다. 김대중이 지지자들의 모금으로 구입한 당사에 대한 애착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호소한 것인데, 다들 알다시피 김대중은 이 건물을 포기하면서까지 탈당을 결행했다. ~~이기택울 반드시 내려쳐야 했으니...~~]면서 [[이기택]]을 공격하는 소재로 활용하였다. 그동안 당명변경, 합당 등으로 계속 이름을 바꾸면서도 등기는 바꾸지 않아서 이런 코메디가 벌어진 것이다. 하여튼 돈이 없어서 사무실 임대로 전전하는 대부분의 [[야당]]들에 비해선 대단히 큰 장점이었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자기 건물을 가지고 있는 야당은 극히 드물다. 지금도 대부분의 정당들은 여의도 아니면 마포/영등포 지역의 빌딩 몇층을 임대하는 식으로 당사를 운영한다. 최근에 [[더불어민주당]]이 여의도에 지상 10층, 지하 4층짜리 장덕빌딩을 200억에 매입해서 입주하였다. 매입대금의 80%는 10년분할 상환 조건으로 은행대출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2021년 [[국민의힘]]이 여의도의 남중빌딩을 매입해 당사로 쓰는 중이다.] 이 건물은 1995년에 시가 50억을 상회하였는데, 1997년 신한국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으로 넘어갔다. 열성 야권지지자들의 돈으로 사들여서 김대중 이름으로 등기가 된 건물이 스리슬쩍 보수정당의 자산이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후 한나라당은 자금 확보를 위해 이 건물을 매각하였고, 현재는 리모델링되어 평범한 빌딩이 되었다. [[http://kko.to/fgbWT6w0B|다음 로드뷰]]] 이합집산과 [[철새(정치)|철새]]가 난무하는 파행적인 한국정치가 낳은 해프닝.[* 이러한 연유로, 명목상 [[제13대 대통령 선거|1987년 대선]] 당시 존재하던 주요 4당의 역사는 모두 [[국민의힘]]이 승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은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서 1개의 당이 되었고, 1997년에 [[평화민주당]]의 후신인 통합민주당과 신설합당을 하면서 이렇게 된 것이다.] 다만 단순히 철새질과 이합집산이 난무하는 파행적인 정치상이라고 일축하기에는 1990년대 당시 한국 정치에서 정파간의 이동과 이합집산이 어느 정도 필연적이었음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6월 항쟁]]과 [[6.29 선언]]으로 [[대한민국 제6공화국|제6공화국]]이 시작되면서 제도적인 민주주의와 정당정치가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그 이전 30년에 이르는 오랜 군사독재로 제대로 된 민주적 정당의 기반은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예를 들어 [[김영삼]]과 [[김대중]]은 한국의 양대 정치세력인 보수계 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의 사실상 시조에 해당하는 인물이지만,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중반 당시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 자체가 보수계 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이 당시의 정당들은 정치적 성향 및 이념을 기반으로 한 정당이라기보다는 명망가를 중심으로 인맥과 연고를 기반으로 한 모임에 가까웠던 것이다. 예를 들어 영남 출신에 부모의 친구가 김영삼과 아는 사이인 정치 지망생은 이념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도 통일민주당에 갔다가 민자당에 들어가고, 호남 출신에 친척이 김대중과 아는 사이인 정치 지망생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이념을 가지고 있어도 평민당으로 가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 결국 1990년대의 한국 정치판에서는 이런 인맥 중심의 집단들이 정치적 지향과 정체성을 가진 정당으로 재편성되는 현상이 치열하게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소속 정당의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들이 그 정당을 떠나 다른 정당에 합류하는 사건도 빈번하게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범민주당계 정당에서 범민자당계 정당으로 넘어간 정치인들이 적지 않은 것 이상으로 그 반대방향으로 이동한 정치인들도 적지 않았고, 이런 과정을 통해 양대 정당의 정치적 통일성이 형성되어 오늘날의 빅 텐트 이념정당인 거대 양당이 탄생한 것이다. 다만 범 민주당계(평민당의 후신) 정당에서 대규모 해체-재구성이 일어난 한 시점에 하필 당권이 (결국 반대쪽 -범 민자당계-로 넘어간) 비주류쪽에 있었기에 정당의 법인과 재산 역시 비주류를 따라가버리는 우스운 해프닝이 벌어진 것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