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투탕카멘 (문단 편집) === 복잡한 후계 문제 === 한편 투탕카멘의 요절 후, 아이는 고령의 나이에 투탕카멘의 [[미망인]]인 [[안케세나멘]]과 결혼해서 제위를 이었으며[* 다른 해석도 있는데, 아이가 안케세나멘의 외할아버지이며 혈연에 의해 제위를 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현재 남아있는 아이와 안케세나멘의 족보가 애매하게 표현되어 이런 견해차가 생겼다.] 고령의 아이가 2년여만에 사망하여 호렘헤브가 그 뒤를 잇고, 아문-라의 사제였던 [[람세스 1세]]가 뒤를 이어 19왕조를 열었다. 이렇게 추정되는 것은 1920년대 아이와 안케세나멘의 이름이 같이 새겨진 반지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보통 결혼의 의미다. 물론 안케센나멘이 아이의 외손녀이므로, 외할아버지와 외손녀의 혈연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정작 투탕카멘이 생전이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한 이는 [[호렘헤브]]였다. 이건 호렘헤브가 파라오 즉위전에 관리 시절에 지었던 멤피스 인근 사카라의 무덤이 1970년대에 재발견되어[* 이 무덤은 19세기에 재발견되었으나, 이 때 발견한 자들이 미술품을 노리는 도굴꾼들이라 무덤의 부조만 떼어내어 유럽과 미국 각지의 박물관에 팔았고 다시 잊혀졌다.] 정식으로 발굴작업을 거쳤는데 이곳에 투탕카멘의 카르투슈와 함께 새겨진 호렘헤브의 여러 직함 중에서 'iry-pat'가 단독으로 많이 새겨져 있었기 떄문인데, 이 직함은 고왕국 시절부터 존재한 매우 역사 깊은 것으로 투탕카멘의 신왕국 시기에는 '왕위 계승자'의 의미로 하사되어서 호렘헤브가 투탕카멘이 정한 공식 후계자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 중 하나다. 또한 이 무덤에 있던 부조는 호렘헤브가 투탕카멘에게서 영예로운 황금'[* 고대 이집트에서 관리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로, 파라오가 황금 목걸이를 하사하는 것이다.]을 하사받는 장면, 봉신 외국인 지배자들과 투탕카멘 부부 사이에서 중재하는 호렘헤브의 모습을 새겨서 호렘헤브가 거짓이 아닌, 실제로 소년 파라오의 치세 기간 중 중요한 고위 직책을 역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투탕카멘의 장례식을 그린 투탕카멘의 무덤 벽화인데 관을 운구하는 관리들 중 미라에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사람은 호렘헤브로 보이며 다른 벽화에서는 두 재상들 사이에서 장례식을 지켜보는 모습이 있는데 이것도 호렘헤브로 추정한다. 하지만 아이가 선수를 쳐서 파라오에 즉위한 뒤 나크흐민을 후계자로 정해서 호렘헤브를 밀어내려 했지만 둘 다 오래 살지 못하고 병사해서 호렘헤브가 파라오에 올랐고 후에 아이는 철저하게 기록말살을 당했지만 투탕카멘은 그냥 기록삭제선에서 끝낸 것도 설명이 된다. [* 호렘헤브의 입장에서 자신을 공식 후계자로 지명했고 관료로 승승장구할 수 있게 해준 이가 투탕카멘이었으니 적대할 이유도 없었고, 재위기도 짧아 굳이 기록말살까지는 할 필요가 없어서 파라오 명단에서 삭제하는 선에서 끝냈다.] 투탕카멘이 죽었을 때 안케세나멘은 [[히타이트]]로 편지를 보내 자신과 결혼할 왕자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하는데, 히타이트 측에서는 '''좋다! 내친 김에 이집트 먹자.'''[* 고대 이집트는 모계 사회의 전통이 많이 남은 여권이 강력한 사회라서 아들이 없으면 딸의 배우자, 즉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도 했다. 그래서 히타이트에서는 이 참에 이집트를 먹을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그와 별개로 여왕들도 몇 명이 있긴 했다.] 식으로 제난자라는 왕자를 보냈지만, 이집트 국경에서 사망하고[* 만화 [[하늘은 붉은 강가]]에서는 이 설을 채택했다.] 안케세나멘도 아이 사후 호렘헤브에 의해 [[숙청]]당했다는 설이 있지만, 아이와 결혼한 이후에 모든 기록이 사라지기 때문에 단순한 가설일 뿐이다.[* 아이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는 설, 파라오를 계승한 아이의 손에 의해 용도폐기 당하고 죽었다는 설, 재혼 이후 이름을 바꿔서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설, 심지어 호렘헤브와 결혼했다는 설까지 다양하지만, 고고학 상의 다른 발견이 있기 전까지는 영구미제일 듯싶다.] 결국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관계는 극도로 나빠졌고, 훗날 19왕조의 3대 파라오인 [[람세스 2세]]의 [[카데시 전투]]도 이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다만 실질적인 화근은 18왕조 [[투트모세 3세]] 시절에 얻은 아시아 영토까지 히타이트 세력이 뻗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어난 충돌이다.] 사실 제난자가 죽은 직후에도 아들의 죽음에 분노한 히타이트의 수필룰리우마 1세는 이집트에 이를 비난하는 편지[* 이 편지의 내용을 보면 제난자는 이집트에서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는 히타이트인들의 추측이라서, 실제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집트에 도착한 후에 사망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를 보내고 이집트령 아시아를 공격했지만, 해당 지역은 때마침 전염병이 돌고 있었기 때문에 수필룰리우마 1세는 병으로 사망하고 원정은 흐지부지되었다. [[우르술라#s-3.3|우르슬라]] 문서 참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