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니스 (문단 편집) ===== 내전기 ===== [[파일:튀니스 밥 제디드 1.png|width=900]] 1278년 알 와시크 (야흐야 2세)에 의해 세워진 성문인 밥 제디드. 메디나의 여섯 성문 중 마지막에 건설되었다.[* 밥 엘 자지라, 밥 카르타게나, 밥 수이카, 밥 메나라, 밥 엘 바흐르, 마지막이 밥 제디드이다.] * 무력으로 주인이 바뀐 해(1279, 1283, 1284, 1309, 1311, 1318, 1347, 1357년) 십자군 후로도 외세의 간섭은 이어졌다. 1272년 9월 샤를은 심복 자크 드 탁시 등의 사절을 투니스에 파견해 약속된 조공과 8차 십자군 당시 남겨둔 목재를 가져오게 하였다. 1277년 부왕 알 무스탄시르를 계승한 야흐야 알 와시크는 2년 후 [[베자이아]]의 숙부 아부 이샤크 이브라힘의 반란에 직면하였다. 이브라힘은 아라곤 국왕 페드로 3세에게 무역 특혜를 대가로 군사 지원을 얻어내어 1279년 8월 투니스에 입성하였다. 군부 역시 그의 편에 서자 알 와시크는 양위하였다. 칼리파 대신 아미르 직위에 만족한 이브라힘은 전임자와 그 아들들을 처형하여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다만 그의 유복자인 무함마드는 살아남아 1295년 즉위한다.] 그후 페드로는 시칠리아의 반란 세력과 공모하며 투니스에 대한 십자군을 준비한다며 에브로 강 하구에서 함대를 준비하였다. 1282년 봄 프랑스의 필리프 3세는 숙부 샤를에게 아라곤 함대의 목적지가 투니스가 아닌 시칠리아임을 알렸지만, 곧 봉기가 시작되었고 실제로 페드로는 시칠리아의 왕으로 등극한다.[* 정확히는 [[콩스탕틴]] 총독 이븐 알 와지르가 페드로와 동맹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아라곤 함대가 당도했을 당시 이미 이브라힘의 아들이자 베자이아 총독인 아부 파리스 압둘 아지즈에게 패하고 살해된 후였기에 사태를 관망하다가 시칠리아 인들의 추대에 응한 것이다.] 한편 1282년 이브라힘은 알 와시크의 아들이라 칭한 마흐디 주의자 아흐마드의 반란에 직면하였다. 후자는 카이라완을 접수한 후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라 칭하였고, 이브라힘의 아들 아부 자카리야 야흐야의 토벌군은 전투도 없이 흩어져버렸다. 1283년 1월, 이브라힘은 혼란에 빠진 투니스를 두고 베자이아 총독인 아들 아부 파리스압둘 아지즈에 의탁하였다. 부왕의 양위를 받은 압둘 아지즈는 칼리파 알 무타디드를 칭하고 튀니지로 진군하였지만 패하고 전사하였고, 사로잡힌 하프스 왕족들은 처형되었다. 틀렘센으로 망명한 야흐야 외에 유일하게 생존한 이브라힘의 이복동생 아부 하프스 우마르는 바누 술라임 등 베두인들을 모아 투니스로 진군하였다(1284년). 이번엔 아흐마드의 병력이 이탈하였고, 7월 12일 투니스에서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2세로 등극한 우마르는 며칠 후 숨어있던 아흐마드를 찾아내 참칭을 실토시킨 후 처형하였다. 그 무렵 현지 부족들의 도움으로 베자이아와 콩스탕틴을 장악한 야흐야가 1285년 투니스와 트리폴리를 공격해오자 알 무스탄시르 2세는 틀렘센과 동맹하여 이를 무마시켰다. 그 무렵 시칠리아의 만종 도중 샤를 2세를 사로잡은 아라곤 왕국은 1286년 투니스의 조공 수납권을 얻어내었고, 이후 하프스 왕조는 아라곤 왕가에 연공을 바쳤다. 그러던 1293년경 마요르카의 기독교 신학자 라몬 율이 투니스를 방문, 무슬림 석학들에게 논리에서 패배한 측이 개종하는 조건의 신학 토론을 청하였다. 이를 불손하다 여긴 알 무스탄시르 2세는 그를 감금하고 사형을 선고하였는데, 한 학자의 조언에 추방형으로 감형하였다. 라몬 율은 1304년 재차 투니스를 방문, 칼리파 알 문타시르(무함마드 2세)에게 많은 서신들을 전달하였다. 4년 후 귀환한 그는 무슬림들의 개종은 무력이 아닌 예배를 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라 1311년 비엔 공의회는 주요 대학들의 아랍어, 히브리어, 아람어 강좌 개설을 결의하였다. 1314년, 82세의 고령에도 선교를 위해 현지 복장으로 투니스를 찾은 라몬 율은 분노한 군중에게 투석을 당한 후 시내의 제노바 상인들에 의해 구출되었지만 이듬해 사망하였다. 한편 1301년 아라곤 왕국과 10년의 휴전을 맺은 알 문타시르는 부친 야흐야에 이어 베자이아를 통치하던 아불 바카 칼리드 앗 나스르[* 1307년 라몬 율은 베자이아에도 찾아왔다. 기존의 투니스에서 소극적 선교에 나서던 그는 이번부터 이슬람의 부정함을 증명하려 하였고, 결국 얻어맞은 후 카디에 의해 감금되었다. 6개월의 감금 후 칼리드는 투니스의 예에 따라 그를 석방한 후 추방하였다.]와 협상하여 둘중 더 장수한 이가 단독 군주가 되어 하프스 조를 통합하기로 하였다. 다만 1309년 알 문타시르가 사망하자 칼리드가 계승해야 했으나 투니스의 무와히드 셰이크들은 칼리드의 6촌 아부 바크르를 옹립하였다. 불과 17일 후 베자이아에서 군대와 함께 당도한 칼리드는 그를 폐위, 처형하고 집권하였다. 그러나 칼리드는 콩스탕틴의 동생 아부 바크르의 반란에 직면하였고, 칼리드의 지배가 가혹하다 여긴 투니스의 유력자들 역시 그에 편에 섰다. 지지를 잃은 칼리드는 양위하였으나 곧 암살되었다. 한편 아부 바크르가 베자이아에서 머뭇거리는 틈에 트리폴리에 머물던 왕공 압둘 와히드 자카리야 이븐 알 리흐야니가 현지 부족들과 투니스로 진군하였고, 시칠리아 함대 및 유럽인 구역의 카탈루냐 용병대의 봉기에 힘입어 도시를 장악하였다. 이로써 하프스 왕조는 다시 동서로 분열되었다. 투니스의 자카리야 1세는 모친의 옛 종교인 기독교로 개종할 의사를 밝히며 아라곤 왕국과 동맹하였고, 철저한 법치를 행하였다. 다만 베자이아의 아부 바크르가 지속적으로 공격해오자 결과를 비관한 자카리야 1세는 야흐야 1세의 장서를 포함한 귀중품 전부를 매각하여 금 2만 파운드와 진주 등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317년 3월, 자카리야는 지방 순행에 나선다며 투니스를 떠났고, 아부 바크르의 진군 소식에도 현지 장교들에게 대처를 맡기고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투니스 지도부는 살인 혐의로 투옥되었던 자카리야의 아들 다르바(알 무스탄시르 3세)를 석방해 추대하였다. 그는 교외 지방을 포함한 외성을 쌓아 수비 강화에 나섰지만, 1318년 초엽 아부 바크르가 투니스를 장악하고 칼리파 알 무타와킬로 즉위하였다. 알 마디야에서 저항하던 다르바는 틀렘센으로 피신하였고, 트리폴리에 있던 자카리야 역시 알렉산드리아로 망명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