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니스 (문단 편집) ==== 내전과 대 알제리 전쟁 ==== ||[[파일:튀니스 시디 마레즈 3.jpg|width=800]]|| || 1692년 건립된 모하메드 엘 베이 무라디(시디 마레즈) 모스크 || 투니스 점령 후, 알리가 알제리와 내통해 집권하려 한다고 여긴 무함마드는 그를 암살하고 단독 집권하였다. 무함마드 베이는 알제리 측의 대리인으로 투니스에 남아있던 무함마드 벤 체케르에 자신의 딸을 결혼시켜 복속시키려 하였으나, 베이 직위를 노리던 후자는 거부하였다. 군부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한 무함마드 벤 체케르는 재차 알제리 군대를 불러들여 투니스를 포위하였고, 장기간의 극심한 포위 끝에 무함마드 베이는 남쪽으로 도주하였다. 1694년 11월 12일 알제리의 데이 차반네 코자와 무함마드 벤 체케르는 도시를 점령하였다. 전자의 튀르크, 후자의 베두인 병력은 시내의 시장들을 약탈하였고, 분노한 시민들은 군부의 주도 하에 봉기하였다. 한편 오스만 원군과 현지 부족들을 모아 돌아온 무함마드는 1695년 5월 1일, 카이라완에서 무함마드 벤 체케르를 격파하였다. 4일 후 투니스 주민들은 도시에 당도한 무함마드에게 성문을 열어주었고, 그는 환영을 받으며 베이로 복위하였다. 알제리로부터 버려져 카스바에 피신했던 데이 아흐마드 첼레비는 그간 저지른 악행을 기억하던 주민들에게 난도질당했다. 무함마드 베이는 두 차례의 포위를 겪으며 파괴된 투니스를 복구하고 안정을 회복하였다. 이듬해 그가 두 어린 아들만을 남긴채 사망하자 디반(내각)은 무라드 2세의 막내 아들 롬다네를 베이로 추대하였으나, 이내 실세로 대두한 그의 피렌체 출신 맘루크 마둘에 대한 주민들과 군부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불안해진 베이는 무함마드의 장남 무라드를 의심, 그를 다르 엘 베이로 소환하여 모반 혐의로 실명형을 내렸다. 하지만 탈출에 성공한 무라드는 각지의 튀르크 주둔군 및 베두인들과 함께 거병하였다. 롬다네 베이는 도주하려 하였으나 붙잡혀 처형되었고, 18세의 무라드는 투니스에 입성하여 베이로 등극하였다. 무라드 3세는 롬다네의 옛 지지자 전부를 학살하였고, 혼란을 틈타 재차 도시를 장악하려 하였던 알제리 당파를 숙청하였다. 이후 알제리에 선전포고한 그는 군부의 지지와 함께 동맹인 트리폴리의 병력과 함께 콩스탕틴으로 진군, 알제리의 데이 알리 코자를 격파하였다(1698년). 다만 알제리 측이 전군을 동원하여 반격해오자 무라드는 콩스탕틴의 포위를 풀고 투니스로 철수하였다. 1701년 재차 알제리와의 전쟁에 나선 무라드 3세는 투니스의 예니체리 아가(지휘관) 이브라힘 샤리프를 코스탄티니예로 파견해 모병을 맡겼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양측의 대립을 끝내라는 지시를 받은 이브라힘은 터키 군대와 함께 가르 엘 멜흐에 당도하였다. 1702년 무라드 3세는 이들과 함께 알제리로 진군하였다. 이에 이브라힘은 [[시파히]] 부대의 아가 후사인과 결탁하여 6월 8일 무라드를 암살하였다.[* 콩스탕틴 진군 도중 와디 자르카에서 함께 행군하던 이브라힘 샤리프는 근거리에서 나팔총(산탄총)을 베이에게 발사하였고, 무라드는 피를 흘리며 도주했지만 곧 튀르크 장교들에게 둘러쌓였다. 누군가 무라드를 붙잡자 다른 이가 월도로 그의 목을 베었다.] 투니스로 귀환하여 무라드의 동생 하산 등 4살배기를 포함한 모든 무라드 왕족을 학살한 이브라힘은 군중의 경악 속에 무라드 왕조의 멸망을 선포하였다. 여론의 분노에 직면한 이브라힘은 기존에 취하려던 베이 칭호를 폐지하고 데이로 선출된 것에 만족하였다. 한편 튀르크 군부는 그의 학살과 독재에 반발하였고, 정권 교체를 틈타 알제리와 리비아의 군대가 양면에서 침공하였다. 이브라힘은 트리폴리 베이를 격퇴했지만 알제의 데이에게는 1705년 7월 8일일 케프에서 패하고 사로잡혀 압송되었다. 이틀 후, 남은 군대와 투니스로 회군한 기병 대장 후사인[* 한때 그는 무라드 3세의 카즌다르(금고지기 / 회계관)였다. 공교롭게도 그는 크레타 출신의 케프 태수 알리 앗 투르키의 아들이었다.]은 7월 15일 디반에 의해 베이로 추대되었다.[* 혹은 8일에 이브라힘이 패하고 10일에 후사인이 등극하였다고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