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니스 (문단 편집) ==== 프랑스의 입김과 혼란 ==== ||[[파일:튀니스 성문 1.jpg|width=800]]|| || 원활한 교통을 위해 1881년 3개의 아치로 확장된 밥 사두운. [[http://www.inp.rnrt.tn/index.php?option=com_content&view=article&id=159%3Aabwabtunis&catid=1%3Asites&Itemid=6&lang=fr|구도심 성문에 대한 상세한 설명(아랍어)]] || 프랑스 인들을 중심으로 유럽인들의 이주가 증가하며 도심이 확장되었다. 특히 밥 엘 바흐르 일대는 유럽인들의 거주지가 되었고, 현재의 카르타게나 거리까지 시가지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새 구역들에는 상수도(1860년), 전등(1872년), 집수 시설(1873년) 등이 세워졌다. 전통적인 무역과 공방들은 쇠퇴하였고, 프랑스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유럽과의 교역이 활성화되었다. 이로써 투니스는 점차 근대적인 도시로 변모하였고, 제도 개혁 역시 지속되었다. 하지만 기존의 사략선 활동이 근절된 상황에서 근대화와 궁전 건설로 인한 지출은 지속된 차관과 증세 외에는 충당될 방법이 없었다. 1863년 프랑스로부터 3500만 프랑을 빌린 것에서 시작한 연쇄적인 빚은 정부 예산을 전부 투입해도 이자를 겨우 충당할 정도로 불어났다. 1863년 무함마드 3세는 기존 메즈바(인두세)를 2배로 인상하고 투니스 등 5대 도시에 대한 면세 혜택을 철폐하여 재정 적자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현지 아랍인들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1864년 봄 각지의 총독들이 축출되거나 살해되는 것으로 메즈바 반란이 시작되었다. 거센 봉기에 직면한 총독들은 투니스로 도피하였고,[* 대표적으로 카이라완 지사 라쉬드 장군 역시 수스로 도주한 후 영국 선박에 올라 투니스로 피신했다.] 각지에는 지방 정부가 세워졌으며 내륙의 교통로는 부족들의 수중에 놓였다. 반란군은 관료 출신 알리 벤 게다헴을 베이 알 움마(민중의 베이)로 추대하며 결집하였다. 무함마드 3세는 헌법 및 증세 철회 등 반군의 요구 사항을 수용하는 척하며 협상을 진행함과 동시에 반격을 준비하였다. 한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자국민 보호를 명분 삼아 함대를 파견하였고, 오스만 조정 역시 투니스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할 기회라 여겨 하이다르 에펜디 휘하의 함대를 파견하였다. 1864년 5월 11일, 오스만 함대는 라 굴레타에 상륙하였고 유럽 열강의 침공을 두려워하던 시민들의 환영과 함께 투니스에 입성하였다. 하이다르 에펜디는 무함마드 3세에게 외교권 이양. 3백만 피아스터의 연공 납부 및 책봉 위한 베이의 이스탄불 방문 등이 담긴 협정을 제안했으나 오스만의 동맹 영국마저 지나치다고 여긴 결과 거절되었다. ||[[파일:튀니스 1864.jpg|width=800]]|| || 1864년 튀니스 앞바다에 정박한 프랑스-이탈리아 함대 || 그러나 오스만 함대의 무력 시위와 50만 프랑 금화의 제공은 무함마드 3세로 하여금 외세의 견제 및 반란 진압의 자금 마련 등 호재로 작용하였다. 그동안 투니스로 진군한 알리는 도시에서 서남쪽으로 40km 떨어진 엘 파흐스에서 정부군과 대치하였다. 6월 29일 투니스에서 출정한 장군 이스마일 엣 순니 사헤브 앗 타바는 알리와 협상하며 더욱 시간을 끌었다. 프랑스와 영국 모두 알리에게 접근하였고, 전자는 베이 교체까지 염두에 두었다. 한편 이탈리아 역시 제노바에서 1만 원정군을 보내 투니스 등 해안을 장악하려 하였으나, 언론의 폭로 후 영국의 항의로 중단하였다. 9월 23일 열강들은 각자의 함대를 철수시키고 베이의 반란 진압에 관여하지 않기로 결의하였고, 같은날 오스만 사절 하이다르 에펜디 역시 떠났다. 이렇듯 열강들의 상호 견제로 인해 튀니지는 반란을 기회로 삼은 유럽의 식민화를 피할 수 있었다. 8월 29일, 추수를 앞두고[* 반군 중 농민들은 추수를 위해 귀향했다. 또한 반란이 장기화됨에 따라 프랑스에게 점령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아흐마드 자루크 장군의 정부군이 투니스에서 출정, 수스에서 반군을 격파하고 해안 도시들에 가혹한 응징을 가하였다. 프랑스령 알제리로 도주했던 알리는 이듬해 초엽 귀국했다가 사로잡혀 옥사하였다. 반란의 종식 후 바르도 궁전으로 압송된 고위급 포로들은 매질을 당하여 대부분 옥사하였고, 반란 지역들은 철저한 수탈과 폭력에 시달렸다. 1865년 7월 30일 자루크 부대가 투니스로 귀환하였을 당시 튀니지 중부와 남부는 피폐해져 있었다. 수확물을 전부 빼앗긴 민중들은 3년간 기근에 시달리며 가축은 물론 식인까지 행하였고, 1867년에는 콜레라와 티푸스까지 유행하며 참상은 절정에 이르렀다. 인구 감소와 납세 독촉으로 과실수마저 전부 베어 팔아버린 결과 튀니지의 농업 사회는 붕괴하였다. 이로써 정부는 차관에 대한 상환 능력을 상실하였고, 파산을 모면하려 지속적으로 더 빚을 지며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러한 상화에서 무함마드 3세의 동생 시디 아델이 밤을 틈타 바르도 궁을 탈출해 베이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 그후 대숙청이 이어졌다. 정치적 혼란과 함께 1868년 튀니지는 사실상 파산하였고, 이듬해 7월 설립된 국제 차관 위원회는 튀니지의 수조권을 위임받았다. 이로써 튀니지는 경제적으로 외세에 완전히 종속되었고, 이제 남은 단계는 군사적인 점령 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