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니스 (문단 편집) ==== 프랑스령 튀니지 ==== ||[[파일:튀니스 성당.jpg|width=360]]||[[파일:튀니스 시디 마레즈 4.jpg|width=664]]|| || 1893-7년 건립된 생 빈센트 드 폴 대성당 || 1899년 메디나의 밥 수이카 광장 일대의 사진 || 1881년 4월, 프랑스령 알제리와 튀니지의 코루마이어 부족 간의 국경 분쟁을 빌미로 프랑스군은 엘 케프, 비제르테(5월 1일)에 이어 5월 11일 투니스를 장악하였다. 다음날 무함마드 3세는 바르도 조약을 체결해야 했고, 그에 따라 프랑스령 위임통치령이 설립되었다. 이듬해 무함마드 3세가 사망하자, 장남 대신 가문의 원로가 계승하도록 규정한 그의 상속법에 따라 동생 알리 3세가 계승하였다. 1883년 6월 3일 그는 라 마르사 협정으로 프랑스에 모든 실권을 양도하였고, 이후 프랑스 군정이 실시되었다. 1885년 4월 5일, 프랑스측 총독이 투니스의 식수 공급권을 한 회사에 넘기려 하자 시의회 전체가 사임하고 시장의 2천여 자산가들을 비롯한 현지인들이 시위에 나섰다. 라 마르사 궁전 앞에 모인 군중은 베이에게 식수 공급권 회복에 나서달라고 청하였으나, 알리는 '눈물의 집에 울려고 왔냐며' 자조적인 답변만을 내었다. 결국 시위는 진압되었고, 주요 인사들은 각지로 유배되었다. 프랑스의 지배 하에 투니스는 빠른 도시화를 이룩하였으나 아랍인들의 옛 메디나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었고, 많은 유럽인들이 정착하여 20세기 초엽 인구의 절반이 유럽계로 구성될 정도였다. 특히 그중 이탈리아인이 1910년 기준 10만 5천으로 가장 많았으며(프랑스인은 3만 5천), 1911년 11월 젤라즈 묘원의 소유권을 두고 발생한 소요 사태 당시 현지 시위대는 이탈리아 공동체와 충돌하였다. 다수의 현지인과 8명의 유럽인이 사망한 이 사태는 프랑스 군경의 발포로 진압되었다. 이듬해 2월에는 이탈리아인들이 주축이 된 회사 소유의 트램에 대한 불매 운동이 벌어졌다. 비록 이 역시 실패하였지만. 젊은 튀니지인들이 언론을 통해 연대감을 형성하였다. 1911-12년의 일련의 시위들은 향후 튀니지 민족주의의 뿌리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을 조용히 넘긴 투니스는 구/신도심을 넘어 위성 도시들이 형성되며 더욱 확장되었다. 다만 [[2차 세계대전]]에 도시는 1942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나치 독일군의 지배를 겪었다. 1942년 당시 베이이던 알리 3세의 아들 아흐마드 2세는 튀니지의 유대인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퇴위당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