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니스 (문단 편집) === 고대 === ||[[파일:카르타고 포에니 튀니지.png|width=448]]||[[파일:튀니스 카르타고.png|width=400]]|| || 기원전 255년 [[바그라다스 전투]]의 전장이던 튀니스 || 기원전 240년 경 용병대 반란 시기 거점이던 튀니스 || 항구 도시 [[카르타고]]의 배후 지역에 위치한 언덕(현 구도심 서쪽 카스바 일대)에 세워진 베르베르인 마을에서 기원하였다. 지명은 베르베르어로 야영지를 의미하는 '투니스'에서 유래하였고, 약 15km 떨어진 카르타고로 향하기 전 마지막 정거장이었다. 각각 서쪽, 서남쪽, 동남쪽, 북쪽 방향에서 카르타고로 접근하는 마을들이 로마 시대에 투니자(현 엘 칼라), 투누수다(현 시디 메스킨), 티니수트(현 비르 부레그바), 투니사(현 라스 제벨) 등으로 기록된 것에서 같은 어원임을 알 수 있다. 기원전 4세기 무렵 그리스인들에 의해 '티네스'로 처음 기록되었고, 도시를 지배하게 된 카르타고인들은 페니키아 여신 타니스와 투니스를 결부시켰다. 중간 기착지 역할 외에도 언덕에 자리한 투니스는 카르타고 일대의 육상/해상 교통을 감시할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기원전 310년부터 3년간 북아프리카 원정에 나선 시라쿠사의 군주 [[아가토클레스]] 역시 이곳을 거점 삼아 카르타고 봉쇄를 시도하였다. 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재정난에 몰린 카르타고는 휘하 용병들의 봉급을 축소하였다. 기원전 241년, 분노한 2만의 용병들은 투니스를 거점으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놀란 카르타고 의회는 전액 납부를 약속했으나, 이미 여러 도시들이 합류해 카르타고의 존망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카르타고군은 이듬해 [[우티카]]에서 패배하였으나 [[하밀카르 바르카]]가 반격에 성공하였다. 기원전 238년 반군은 카르타고 포위를 풀고 본거지 투니스로 철수, 군대를 양분하여 마토가 수비에 치중하고 스펜디우스가 하밀카르와 대적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후자는 포위된 후 전멸하였고, 이후 하밀카르는 투니스를 포위하였다. 투니스는 동쪽과 서쪽에 석호가 있었기에 카르타고군의 진영은 남, 북에 세워졌다. 하밀카르는 사로잡힌 반군 지도자들을 투니스에서 보이는 곳에서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마토는 야습에 성공한 후 역으로 카르타고인 포로들을 같은 곳에서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하밀카르는 후퇴하여 재정비하였고, 그 사이에 마토는 투니스를 떠나 렙티스 파르바로 향하였으나 카르타고 측이 병력을 총동원하여 공격해오자 대패하며 반란은 진압되었다. 카르타고 시대의 투니스의 주민들은 농민, 어부, 장인 등의 직업군으로 구성되었다. 카르타고 시보다는 작은 도시였던 투니스는 (역사가 스트라보에 의하면) 기원전 146년 3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군에 의해 카르타고와 함께 파괴되었다. 다만 카르타고보다 먼저 재건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기에 로마령 아프리카 속주의 중요한 농업 도시로 자리잡았다. 포이팅거 지도에 '투니'라는 지명으로 등장한 도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역참의 의미를 지닌 무타티오로 분류되었다. 로마화와 기독교화를 거친 투니스(혹은 투네스)는 주교좌가 되었다. 다만 대도시로 부활한 카르타고에 비하면 한참 작은 규모로, 그 후광에 가려져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7세기 말엽 [[이슬람 정복]] 후 역전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