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니스 (문단 편집) ==== [[아글라브 왕조]] ==== ||[[파일:튀니스 중심부.png|width=760]]|| || 앗 자이투나 사원. 아글라브 왕조 기에 예배당이 완성되었고, 돔은 지리 왕조 시대인 991년 세워졌다. || 반란 진압 후 무할라브 가문은 이프리키야 총독위를 세습하였다. 787년 라우흐 이븐 하팀이 사망한 후 친척 나스르가 계승했는데, 불만을 품은 전자의 아들 알 파들은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를 설득해 총독위를 차지하였다(791년). 그러나 나스르를 지지하던 준드 (아랍 군부)가 반발하였고, 투니스 주둔군은 알 파들의 조카인 태수 알 무기라와 대립하였다. 알 파들이 태수 교체 요청을 거부하자 그들은 장교 압둘라 이븐 자루드 하에 봉기하여 알 무기라를 도시에서 축출하였다. 그후 압둘라는 알 파들과 협상, 충성을 약속하며 새 태수의 파견을 청하였다. 이에 알 파들은 사촌 압둘라 이븐 야지드를 파견했는데, 후자가 투니스 부근에 이르렀을 무렵 압둘라가 사절로 파견한 일단의 병력이 명령을 불복하고 신임 태수를 공격해 살해하였다. 이제 타협이 불가하다고 여긴 압둘라는 반란을 일으켰고, 인근 도시들에 격문을 보내어 동참을 호소하였다(794년). 이에 현지 준드가 집결하였고, 알 파들은 토벌에 나섰으나 패하고 카이라완으로 철수하였다. 압둘라는 그를 추격, 도시를 포위해 항복시킨 후 알 파들을 처형하였다. 압바스 당국은 무할라브 가문 외의 하르마타를 파견해 질서를 회복했으나 그의 후임자 무함마드 이븐 무크타일 알 아키[* 압바스 왕조의 개국공신 무크타일의 아들이자 칼리파 하룬의 대부였다.]는 재차 준드와 대립하였다. 마클라드의 반란에 이어 799년 10월 투니스의 타맘 이븐 타밈 앗 타미미가 봉기하였고 큰 호응을 얻었다. 타맘은 카이라완으로 진군, 무함마드를 격파하고 도시에 입성하였다. 트리폴리로 철수한 무함마드는 자브 태수 이브라힘 이븐 알 아글라브가 카이라완을 수복하자 귀환하였다. 투니스로 도주했던 타맘은 재차 남하하였으나 이브라힘에게 다시 패하고 중앙 정부에 복속하였다. 이듬해인 800년 여름, 이브라힘은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에게 상주하여 이프리키야의 아미르로 봉해졌다. 그후 아글라브 가문이 총독위를 세습하며 사실상의 세습 왕조가 설립되었다. 아글라브 왕조는 정치적으로 기존 총독들과 준드 간의 갈등에 더하여 종교적으로도 [[무타질라 학파]]를 따랐기에 카이라완의 [[말리키]] 울라마와 대립하였다.[* 따라서 이브라힘 1세는 카이라완 남쪽에 궁전 도시 알 압바시야를 세워 머물렀고 흑인 노예 군단을 대거 기용하여 준드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자 하였다] 3대 아미르 지야다탈라 1세에 이르러 관계는 악화되었고, 824년 준드 부대를 해산시키려는 그의 시도는 투니스에서의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는 836년에야 베르베르 부족들의 도움으로 진압되었고, 따라서 827년 동로마령 시칠리아 원정에 나선 아글라브 함대는 반군이 장악한 투니스가 아닌 [[수스]]에서 출항하였다. 이어진 9세기 중반의 안정기에 자이투나 사원은 864-65년에 걸쳐 증축되었고, 880년경 아미르 이브라힘 2세에 의해 완성되었다. 다만 893년 이브라힘이 알제리의 준드 장교 1천여를 초청한 후 학살하자 투니스를 필두로 각지의 준드 부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한때 카이라완 일대로 몰렸던 이브라힘은 수단 (흑인) 부대로 반격하여 반란을 가혹히 진압하였다. [[https://en.wikipedia.org/wiki/Mohamedia,_Tunisia|준드 반란을 이끈 만수르 앗 툰부디의 거점 툰부다]] 한편 이브라힘의 잔혹한 통치를 보고받은 칼리파 [[알 무타디드]]는 그의 폐위를 선언하였다. 901년 말엽 칼리파의 칙령을 지닌 사절이 투니스에 당도하였고, 예상 외로 이브라힘은 순순히 아들 압둘라에게 양위하였다.[* 그후 이브라힘은 시칠리아를 거쳐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다가 코센차에서 병사하였다.] 이때부터 아글라브 아미르들은 라카다 대신 투니스에 머물렀고, 지야다탈라 3세는 옛 로마 극장에 궁전을 세웠다. 한편 그는 서쪽에서 세력을 키우던 파티마 반란군에 대비해야 했다. 907년 그는 라카다로 돌아가 도시를 요새화하고 대군을 편성한 후 자신은 투니스로 귀환하였다. 다만 파티마 지휘관 알 쉬이가 예상과 달리 북부 해안 대신 내륙으로 진군하자 908년 재차 라카다로 향하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다. 909년 아글라브 왕조를 멸한 알 쉬이는 카이라완 부근 라카다 궁전과 함께 투니스의 수로를 '동방을 능가하는' 마그레브의 양대 걸작이라 평하였다. 이슬람권 3대 해군 기지이자[* 다른 둘은 [[이스칸다리야]], [[트리폴리(레바논)|트리폴리]]였다.] 아글라브 왕조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였던 투니스는 이제 시아 [[파티마 왕조]]의 지배 하에 놓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