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니지/역사 (문단 편집) == 중세 == * 상세 내용은 [[튀니스]] 문서 역사 부분 참고 중세 이슬람 시대에는 튀니지를 비롯한 로마 시절 아프리카 속주 지역을 그대로 음차해서 이프리키야(إفريقية: Ifriqiya(h))라고 불렀다. 이프리키야의 중심 도시는 670년경 이슬람 군대가 침공할 때 세워진 카이라완이었다. 군사적 거점을 만들기 위해 세워진 도시라 이름도 아랍어로 '요새' 라는 뜻이다. 이 도시는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슬람 제국에서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으로 아주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오늘날 튀니지의 수도인 [[튀니스]]는 이때까지만 해도 작은 어촌이었으나 이 시기에 군항이 세워졌다. 반면 카르타고, 우티카 같이 로마 시대에 번영했던 도시는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 하지만 우마이야 조의 북아프리카 지배도 [[베르베르 대항거|8세기 중반 모로코에서 이슬람의 한 분파인 하리지 파를 믿는 베르베르인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큰 위기를 맞는다. 아바스 조가 성립되고 나서도 북아프리카에 대한 중앙 정부의 영향력은 약해서 800년경 형식적으로만 아바스 조의 신하이고 사실상 독립 왕조인 아글라브 조가 성립되었다. 백여년 간 튀니지를 중심으로 한 마그레브 지역에 정치적, 군사적 안정이 되돌아오면서 농업과 무역, 문화가 되살아나기 시작했으며 이슬람 법률의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마그레브 지역에 말리키 학파가 자리 잡은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아글라브 조는 한때 시칠리아를 정복하기도 했으며 시칠리아는 12세기에 노르만인에게 정복 당할 때까지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한편 [[알제리]] 내륙에서 [[리비아]]에 이르는 건조 지대에는 하리지 파의 베르베르족이 아글라브 조와 공존했으나 이후 파티마 조에 의해 함께 멸망당한다. 900년대 [[시아파]] 베르베르인이 반란을 일으켜 909년 카이라완을 점령하고 [[파티마 왕조]]를 세웠다. 파티마 조는 마그레브 전역을 정복해 배후의 위험이 없어지자 969년 [[이집트]]를 침공하고 [[카이로]]를 세워 수도로 삼았다. 자연히 서쪽 마그레브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은 약해져서 오늘날의 튀니지인 이프리키야는 파티마 조의 섭정인 지리 조가 실질적으로 독립적으로 통치했다. 처음에는 잠깐 번영하는 것 같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사하라 사막을 통한 무역이 쇠퇴하고 그 대안으로 선택한 해상 무역도 [[이탈리아]] 도시와의 경쟁으로 쉽지 않아 경제가 기울기 시작했다. 1048년 지리 조가 수니파로 전향하며 파티마 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파티마 조는 1058년 바누 힐랄 등 아라비아 반도 출신의 베두인족을 보내 지리 조의 영토를 해안가 일부로 축소시켜버렸다.[* 이러한 해석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특히 힐랄 침공의 원인과 결과에 관해서는 연구자들 간에 이견이 많다.] 약체가 된 지리 조는 노르만족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다. 이후 약 백여년 간 이프리키야는 베두인과 노르만족의 공격으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그러다 서쪽 멀리 모로코 서남부에서 발흥한 베르베르 계의 알모하드 조가 1150년대 이프리키야를 정복하여 이러한 무정부 상태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편 바누 힐랄 등 아랍계 베두인족의 침공과 이주는 이 지역의 아랍화를 가속시켰으며 이슬람화가 더뎠던 내륙의 베르베르인 거주지에서도 인구가 아랍계로 교체되거나 하여 아랍어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13세기 초에 알모하드 조가 결정적인 타격[* 원래 버전에서는 [[레콘키스타]]라고 되어 있었는데, 그보다는 알모하드 조의 내분이 보다 근본적이고도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기독교 군대에 의한 패배는 그 결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을 입으면서 휘청거리자 알모하드 조에 의해 이프리키야를 지배하던 베르베르계의 하프스 가문은 1229년 독립을 선언하고 하프스 조를 세운다. 하프스 조는 비교적 수명이 긴 편이어서 14세기 중엽에 잠시 경제적, 군사적 위기를 맞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프리키야가 다시금 이슬람 세계의 중심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사하라를 통한 육로 무역과 지중해를 통한 해상 무역이 발달했으며 무역의 발달에 따른 법과 제도도 정비되었다. 문화적으로는 교육과 시, 건축이 발달하고 이븐 할둔과 같은 학자도 배출되었다. 또 베르베르인의 아랍화가 진행되어 아랍어가 더욱 널리 퍼지고 베르베르인과 아랍인 간의 구분이 약화되었다. [[레콘키스타]] 운동을 피해 건너온 이베리아 출신 무슬림과 유대인도 이 지역 문화와 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는 한편 이프리키야를 중심으로 국가의 후원을 받는 해적이 활발히 활동해서 유럽 국가가 군대를 보내 침공하기도 하였다. 하프스 조는 15세기 중후만 우스만 칼리프 때에 전성기를 맞았으나 16세기에는 각기 전성기를 맞은 [[스페인]]과 [[오스만 제국]]이 세력 대결을 벌이는 지역이 된다. 1534년에 오스만 제국이 튀니스를 1년간 점령하자 오스만의 위협을 피해 스페인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1574년 오스만이 스페인을 물리치고 튀니스를 점령하여 멸망하고 튀니지는 오스만의 튀니스 에야레트(현대 대한민국의 도(道)에 해당하는 최상위 지방행정조직)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