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니지/역사 (문단 편집) == [[오스만 제국]] 시대 == 오스만 제국의 북아프리카 진출은 [[바르바리 해적]] 두목 가운데 하나로 바르바로사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하이르 앗 딘]]과 그 형 [[바바 우르지]]가 1516년 알제를 정복하고 1518년 스스로 오스만 제국의 신하가 되어 베일레르베이[* 단어의 본래 뜻은 '총사령관'이나, '대총독' 이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라는 칭호를 수여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참고로 16세기 중엽은 바르바리 해적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여 지중해를 오가는 기독교 무역선과 해안 도시, 마을을 휩쓸고 다니던 시기로 북아프리카 해안은 이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당시 북아프리카의 현지 이슬람 정치세력은 군사적, 경제적으로 북쪽의 기독교 국가, 특히 에스파냐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발칸 반도와 지중해에서 기독교 국가를 견제할 오스만 제국의 존재는 이들의 생존에 중요했으며 오스만 제국 덕분에 튀니지가 아직도 이슬람 문명권에 남아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프스 조에게는 오스만 튀르크가 에스파냐보다 왕조의 존속에 더 큰 위협이었고 1574년 울루지 알리가 튀니스를 최종적으로 알제의 베일레르베이령에 포함시킴으로서 하프스 조는 멸망하고 이프리키야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된다. 1587년 울루지 알리가 사망한 후 베일레르베이는 폐지되었고 오스만 중앙 정부에 의해 임명된 파샤가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지역을 각각 다스리게 되었다. 파샤 아래에는 세금 징수 등을 맡은 베이, 튀르크 장군과 현지 유력자로 이루어진 협의체이자 중앙 행정 기구인 디완, 예니체리 부대의 지휘관인 아가, 백인대장과 같은 존재였던 데이, 그리고 정부의 주요 수입을 제공했던 해적 등이 있었다. 지배 계층은 대부분 튀르크인이어서 튀르크인 지배자와 튀니지인 피지배자의 분리가 존재했다. 또 튀르크어의 유입으로 베르베르어는 더욱 위축되게 되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은 1591년에 예니체리 부대가 반란을 일으켜 그들의 하급 지휘관인 데이(dey) 중 한 명을 데이(Dey)로 선출하였다. 데이는 수도에 대한 통치와 군권을 행사하고 파샤를 형식적인 지위로 격하시키고 디완을 해산함으로써 튀니지의 실질적인 통치차가 되었다. 데이에 의한 통치는 짧지만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정치적, 사회적 안정이 회복되었으며 특히 우스만 데이(1598-1610)와 유수프 데이(1610-1637) 하에서 튀니지는 경제적으로도 회복하고 여러 공공사업이 진행되었다. 또 이 시기는 16세기 중반에 이어 해적 활동이 다시금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1640년에 데이가 사망하자, 당시 파샤 직을 겸하고 있던 (무라드 쿠르소의 아들) 하무다 베이는 디완이 해산으로 인해 불만을 갖고 있었던 유력자들과 지방의 부족들, 파샤라는 직위가 주는 이름값 등을 통해 데이가 되는 데 성공하고 이로서 파샤와 데이에 이어 베이가 튀니지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다. 하무다의 아들 무라드 2세는 디완을 복원하고 예니체리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1675년 그의 사후 무라드 가문에 내분이 일어나 인접한 알제리에서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등 혼란한 상황이 발생하고 1702년 무라드 가문의 마지막 베이가 암살됨으로서 무라드 시대는 끝나게 된다. 한편 무라드 시대에는 또한 해적 활동이 감소하고 대신 유럽 국가와의 지중해 무역이 증가하였다. 튀니지 정부는 이 무역을 독점하여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되었으나 민간 상업의 성장은 지체되었다. 무라드 2세 사후의 혼란은 1705년 후세인 이븐 알리가 베이에 오름으로서 마무리된다. 이후 튀니지는 후세인 왕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성을 확보하였으며 1715년 오스만 중앙 정부에서 후세인을 대신할 파샤를 내려보냈으나 후세인 베이를 지지하는 현지 유력자들에 의해 거부당해 오스만 제국이 후세인을 암묵적으로 인정해야 했을 정도이다. 후세인 조는 오스만의 간섭을 우려해 오스만과의 관계는 최대한 형식적으로만 유지했으며 예니체리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오스만 제국이 인정한 하나피 학파가 아니라 튀니지를 중심으로 발달한 말리키 학파의 이슬람 법학자를 관료로 임명하고 튀니지/튀르크 혼혈 및 튀니지인의 관직 진출을 확대하는 등 독립적인 면모를 강화하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전쟁이 끝날 때까지 튀니지는 유럽으로의 수출이 증가하여 경제적 번영을 누리게 된다. 또 이 시기는 바르바리 해적의 마지막 전성기에 해당한다. 1820년대 이후 크게 악화한 무역수지는 독점 무역으로부터 얻는 이익이 주요 수입원이었던 튀니지 정부가 큰 부채를 지는 원인이 된다. 더불어 산업화에서 뒤쳐졌던 튀니지는 값싼 수입상품의 유통으로 전통적인 제조업이 쇠퇴하며 경제적으로 위기 상황에 놓이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