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니지/역사 (문단 편집) == 근대([[프랑스령 튀니지]]) == 아흐메드 베이(1837-1855)에 의해 튀니지의 근대화 노력이 시작되게 된다. 튀니지는 종주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2세]], [[이집트]]의 [[무하마드 알리]]를 본받아 개혁에 나서며 근대적인 통신, 교통, 군대, 교육기관을 도입하거나 도입할 계획을 세우고 1863년에는 (물론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 체제였지만) 헌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그레브의 고질병인 미약한 중앙 정부와 그로 인해 잘 걷히지 않는 세금, 유럽의 [[산업 혁명]]으로 생산된 값싼 수입 상품의 범람으로 인한 무역 적자, 가뭄과 전염병 등 자연 재해, 이상의 원인으로 인한 심각한 경제난과 재정 적자, 거기에 부패(e.g. 중앙은행 총재가 자본금을 통째로 들고 [[프랑스]]로 튐)까지 더해지며 1867년에 튀니지 정부는 파산을 선언하고 만다. 2년 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채권단을 구성하여 튀니지 경제를 정상화해보려고 했으나 이 또한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실패하게 된다. 한편 19세기에는 이탈리아, 주로 시칠리아에서 많은 수의 이탈리아인 이민자가 유입되어[* 최대 13만 명까지 튀니지에 살았다. 그당시 튀니지의 인구를 생각하면 상당한 수.] 당시 인구가 백만 명 정도에 불과하던 튀니지 사회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프랑스는 이를 좋지 않게 여겨서 프랑스 식민지가 된 이후 프랑스는 튀니지 내 이탈리아인을 탄압하여 이탈리아인은 점차 줄어들게 된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프랑스의 튀니지에서의 이탈리아인에 대한 대우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다니까 차별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튀니지를 노리는 나라는 바로 옆의 알제리로는 모자라 튀니지로 진출하려던 프랑스와 당시 막 통일을 마치고 식민지 쟁탈전에 합류한 이탈리아로 압축된다. 이탈리아는 이미 튀니지에 정착한 수십만 명의 이탈리아인을 근거로, 튀니지를 자국의 식민지의 첫 케이스로 삼기 위해 튀니지 쟁탈전에 열심이었으나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진 오스만 튀르크의 발칸 반도 영토 처분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튀니지를 프랑스의 영향권에 넣기로 하고 이탈리아에게는 대신 트리폴리타니아 지역[* 현 [[리비아]] 북서부.]의 지배권이 주어진다.[* 그리고 이 명분은 이탈리아가 1911년 오스만한테 전쟁을 선포하고 리비아를 침공하는 명분이 된다.] [[파일:프랑스령 튀니지 국기.svg|width=300]] [[프랑스령 튀니지]] 국기 프랑스는 튀니지를 평화적으로 점령하고자 후세인 조와 협상을 시도하지만 당연히 될 리가 없고 침략할 구실을 찾던 와중에 1881년 튀니지와 알제리 변경의 한 부족이 알제리를 약탈한 것을 빌미로 군대를 튀니지로 진격시켜 바르도 조약을 맺어 군사권과 외교권을 뺏고 튀니지를 보호령으로 만든다. 뒤이어 재정에 관한 권한 역시 프랑스가 갖게 되면서 후세인 조는 이름만 존재할 뿐 튀니지는 실질적으로는 프랑스 식민지가 된다. 경쟁국 이탈리아는 즉각 항의했으나 주요 열강들이 프랑스 편을 들자 마지못해 1893년 프랑스의 튀니지 지배를 인정한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삐친 이탈리아는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동맹을 체결, [[삼국 동맹]]에 가담한다.] 각설하고 1882년에 베이가 사망하자 프랑스는 알리 베이를 즉위시키면서 튀니지와 오스만 제국과의 형식적인 유대도 끊어지게 된다. 프랑스는 알제리의 경우처럼 프랑스인 이주자(콜롱)에게 많은 경제적 특권을 주어 튀니지에 최대한 많은 이주자를 유치하려 노력하였으며 1891년에는 만 명에 불과하던 프랑스인 이주자는 1945년에는 14만 4천명으로 증가한다.참고로 이는 당시 튀니지 인구 전체중 8%에 해당하는 인구였다. 프랑스는 철도와 도로, 병원, 수도, 관개 시설, 교육 기관 등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농장과 광산을 개발하여 튀니지의 경제 수준, 인구와 튀니지인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켰다. 하지만 숙련 노동은 전부 프랑스에서 공급받았고 급격하게 프랑스인의 농지를 확대하여 프랑스의 정책이 프랑스 본국만을 위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며 튀니지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1880년대 이후 아랍 세계에 아프가니, 압두 등의 개혁가가 출현하면서 튀니지도 이들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을 유지하되 서양의 합리주의와 과학 기술로 사회를 점진적으로 근대화하려는 운동이 발생하고 이런 사상을 담은 언론 매체가 출현한다. 이러한 운동은 점차 튀니지 독립 운동으로 발전하여 1920년 데스투르 당의 설립으로 이어진다. 데스투르는 아랍어로 '헌법' 이란 뜻으로 1863년 제정된 헌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탄압과 내부 갈등에도 불구하고 데스투르 당(그리고 거기서 갈라져나온 신 데스투르 당)은 노동자 세력과 연대하여 독립 운동을 이어나갔다. 1940년에 프랑스 본국이 [[독일]]에게 점령당하면서 튀니지는 [[비시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이곳은 치열한 [[북아프리카 전역]]의 무대가 된다. 1942년 11월엔 튀니지에 전부터 눈독을 들인 [[이탈리아 왕국]]에게 양도된다. 그러나 동쪽에서는 엘 알라메인 전투의 패배로 독일군이 후퇴하고 서쪽에서는 [[횃불 작전]]에서 영미 연합군이 수적으로 불리한 비시 프랑스군을 제압한 데다 연합군의 공중 폭격으로 보급이 불가능해지면서 결국 1943년 5월 13일 [[추축국]] 군대가 항복하여 튀니지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다. 2차대전 후 [[하비브 부르기바]]가 이끄는 신 데스투르 당 및 그와 연대한 튀니지 노동자 총연맹(UGTT)(참고로 공산주의와는 상관 없음)은 법아랍주의 계열과의 내부 갈등을 이기고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실패하고 알제리 문제로 코가 석 자인 상황에서 프랑스는 1955년 튀니지의 독립을 약속하고 1956년 3월 20일, 튀니지는 베이였던 무하마드 8세 알 아민을 국왕으로 하는 튀니지 왕국으로 독립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