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르키예/역사 (문단 편집) === [[오스만 제국]] === [[룸 술탄국]]에서 [[오스만 1세]]가 [[오스만 제국]]을 개국한다. 아나톨리아 지방의 수많은 튀르크계 군소 군벌 중 하나였던 오스만 왕조의 초기 역사는 주변 소국들, 그리고 [[동로마 제국]]과의 끝없는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제4대 술탄인 [[바예지트 1세]]가 헝가리를 중심으로 뭉친 십자군을 니코폴리스에서 발라버리고 발칸반도를 유린하던 도중에 [[오스만 제국]]보다 훨씬 더 군사력이 강력한 [[티무르 제국]]의 공격으로 술탄 [[바예지트 1세]]는 포로가 되면서 오스만 제국이 위험에 빠진 경우도 있다. 1520년부터 1566년까지 [[쉴레이만 1세]]의 치세가 최전성기. 이 시기에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왕국]] 전체를 점령하고 북아프리카와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이란]] 서부, 흑해 일대를 통치하는 대제국이었다. [[포르투갈]]의 위협에 시달리던 동부 아프리카, 심지어 [[동남아]]의 [[인도네시아]] 군소 술탄들의 요청으로 함대까지 띄우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근대에는 나라가 기울어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제국]]에게 털리고 이집트나 시리아 등지가 반 독립국이 되는 등 빈사상태에 있다가 [[제1차 세계 대전]]에 [[동맹국]]으로 참전했다 패배한 것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었다. 1차대전 이후의 항복협상에서 아랍 지역의 영토는 모두 [[협상국]]이 뜯어갔다. [[러시아 제국]]은 [[이란]] 북부, [[대영제국|영국]]은 이란 남부와 [[이라크]], [[요르단]], [[아라비아 반도]]를 점령하고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삼았으며, [[프랑스 식민제국|프랑스]]는 [[시리아]], [[레바논]]을 [[위임통치]]했다. 이 당시 영국이 오스만 제국의 후방을 교란시키기 위하여 아랍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차후 독립국가 건설을 보장하는 이중플레이를 했다. 이것이 지금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의 시작이다. 이런 와중에도 [[프랑스]]와는 전후 아랍영토 분할 밀약을 맺었다. 즉 처음부터 아랍과 유대인 독립국가 보장은 뻥이었던 것. 결국 [[이라크]], [[요르단]] 일대는 영국의 반식민지가 되었다. 지금의 아랍왕정들은 다 이때부터 출발한 것. [[아나톨리아]] 지역도 수도 코스탄티니예(현재의 [[이스탄불]])를 포함해 절반 이상이 [[협상국]]에 의해 분할될 위기에 놓였으며, 1920년에는 한층 더 앙숙인 [[그리스 왕국]]의 침공까지 받게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reatyOfSevres-ko.png]] 또한 이 오스만 제국 시대의 말기는 튀르키예인들에게 다른 면에 있어서 흑역사였는데, 바로 [[아르메니아인]]들과 [[아시리아인]]들, 그리고 자국내 [[그리스인]]들에 대한 대학살이 그것. [[쿠르드인]]을 제외하면 단일민족 국가와 다름없는 현대 튀르키예와는 달리[* 현대에도 정부가 공식적으로 통계를 내지 않을뿐이지, 튀르키예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의 종은 70여에 달한다. 그중 메이저급만 언급하더라도 [[쿠르드]], [[그리스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잔인]], [[투르크멘인]], [[보슈냐크인]] 등등] 당시의 튀르키예는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살았는데, 상당수가 [[민족주의]]의 시대에 정리되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오스만 제국 시기에는 밀레트(Millet)라는 종교에 바탕한 공동체들이 각자의 대표를 뽑고, 그 대표가 술탄에게 세금을 바치고 행정, 사법업무는 공도체가 자신들만의 관습으로 자체적으로 다루는 식으로 통치가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오늘날의 그리스인과 루마니아인, 불가리아인 등등은 [[정교회]] 밀레트에 속했고, 유대인은 [[유대교]] 밀레트에 속했고 그 안에서 자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통치는 1821년 그리스에서 독립전쟁이 시작되면서 깨지기 시작했다. 민족주의의 열풍에 오스만 지배하의 민족들(그리스인, 세르비아인, 루마니아인, 불가리아인, 아랍인 등...)은 독립을 원했고, 당연히 오스만 제국은 이들을 탄압했다. 하지만 서구열강들의 무력에 의해 이들 소수민족들은 하나하나 독립해 민족국가를 세우기 시작했고, 한편 아르메니아인들도 1880년대에 들어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리스가 독립할 무렵에도 충직한 오스만 제국의 구성원으로 남았기 때문에 '충성스러운 밀레트(Millet-i sadıka)'라는 별칭까지 받으면서 정부의 요직들을 독점했지만, 오스만 제국과 번번이 대립하던 [[러시아 제국]]에서 아르메니아 독립운동가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게 하자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도 더이상은 좌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아르메니아인들은 두번에 걸친 학살을 겪는데, 1894년과 1915년이 그것이다. 자세한 건 [[아르메니아 학살]] 참고. 아르메니아 문제의 시작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아르메니아인들 가운데서 독립적인 성향을 가진 민족주의 과격단체들이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반, 시바스에서 튀르키예인 5000여명을 학살한데서 비롯되었다. 당연히 오스만 제국은 분노했고, 이들 과격단체들을 색출함과 동시에 이들과 협조 가능성이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저 멀리 히자즈(지금의 이스라엘, 요르단, 시나이 반도 일대)에 강제이주시켜 이들과 분리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강제이주정책은 과거 알바니아에서도 그러했고, 오스만 제국사에서 선례가 있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오스만 제국의 상황에서는 200여만에 달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을 모조리 강제이주시킬 여력도 능력도 없었고, 결과적으로 코스탄티니예에 거주해서 통제가 용이한 아르메니아인들과 무슬림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러한 이주에서 제외되었다. 다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은 강제이주령에 순응했고, 그들은 멀리 이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가 지옥의 시작이었으니...오스만 제국의 재정상태로는 수백만에 달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을 먹일수도, 기차를 태워 보낼 수도 없었다. 게다가 당시 히자즈 지방조차도 영국의 지원을 받은 아랍 반군들로 인해 전쟁터가 된 상황이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강제이주에 동참한 아르메니아인들은 상당수가 기아로 굶어죽거나,질병으로 죽어가거나, 겨울철에 얼어죽거나, 혹은 도적들에 습격당해 사망했고 심지어 같은 아르메니아인들도 분열하여 서로 죽이기 시작했고 덩달아 학살당하던 쿠르드족이나 시리아인들까지 가세하여(이게 아르메니아놈 탓이라고 분노) 서로 싸우며 죽어간 것도 제법 된다. [[그리스]]야 [[튀르키예 독립전쟁]] 당시 서로 정식으로 치고박고 학살도 했기 때문에 억울한 소리를 할 수가 없는 처지지만, 약소 피지배민족인 아르메니아인들과 시리아인들에게는 유태인들의 제노사이드보다도 더 뼈아픈 기억이다. 아니, 사실 이 학살이야말로 제노사이드라는 현대적인 개념을 정립한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아르메니아 주장으론 1915년 한해에 아르메니아인들만 무려 150만~200만명이 학살당한것으로 주장'''하되는데, 이는 당시 전세계 아르메니아인 인구의 절반이자 튀르키예 인구의 10%나 되는 수치였다! 이 일로 튀르키예내 상당한 세를 유지하고 있던 기독교 인구는 싹 쓸려나가 오늘날의 절대다수 이슬람국가 튀르키예가 탄생하게 되었다. 한편 콘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오늘날까지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고, 튀르키예 독립전쟁이후 그리스로 쫓겨난 그리스인들과 달리 이들은 인구교환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튀르키예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다름아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이다. 아르메니아 문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아르메니아]]가 소비에트에 합병되고, 스탈린 시절에 수많은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숙청되면서 쉬쉬하다가 냉전붕괴 이후로 수면에 드러나지 시작했다. 하지만 튀르키예 정부와 사회 전반의 인식은 일단 '''대학살은 우리의 잘못만이 아님'''이라 빠른 시일내에 빈말의 사과조차 받기는 힘들듯 하다. "조사를 철저히 해서 우리의 잘못으로 드러난거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다. 단 같은 아르메니아인들끼리 싸우다 죽은거나 쿠르드족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사례도 알려진게 꽤나 많으니까 일일이 다 따져보자" 라는게 현 튀르키예 정부의 입장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