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르키예/역사 (문단 편집) === [[무스타파 케말]]과 [[튀르키예 독립전쟁]] === [[1918년]] 10월 30일, [[오스만 제국]]과 [[협상국]] 사이에 무드로스 [[정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오스만 제국은 [[동맹국]]에서 이탈했는데, 이는 말이 정전이지 사실상 [[항복]]이나 다름 없었기에 [[수도(행정구역)|수도]] [[코스탄티니예]]에는 [[영국군]]이 [[승전국]] [[군대]]로서 무혈입성하여 [[해외 주둔 영국군|주둔]]했고, [[1920년]] [[세브르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사분오열되어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자 일부 [[오스만 제국군]] 부대가 [[실지회복주의|영토 수복을 외치며]] [[아나톨리아]] 각지에서 [[봉기]]했는데, 협상국에 굴복한 [[파디샤]] [[메흐메트 6세]]의 [[정부]]는 [[갈리폴리 전투]]의 [[전쟁영웅|영웅]] [[무스타파 케말]] [[파샤]]를 파견하고 그들을 설득하여 무장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케말은 [[삼순]]에서 그들에게 합류할 것을 선언하고, [[앙카라]]에서 [[독립군]] 세력을 규합한 대국민의회를 창설하여 본격적인 [[튀르키예 독립전쟁|독립전쟁]]을 시작했다. 사실 오스만 제국이 건재했을 당시에도 [[넘사벽]]의 [[국력]]을 갖고 압도했던 협상국들[* 지금도 튀르키예와 서구의 국력 차는 넘사벽이다.]을 오스만 제국군의 [[잔당]]에 불과한 독립군이 상대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었지만, [[1차 대전]] 직후의 [[피로]] 때문에 더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협상국들은 독립군 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메갈리 이데아]][* [[동로마 제국]] 시절의 고토 [[수복]]을 주장하는 [[그리스]]의 [[내셔널리즘]] [[사상]]]를 실현하려는 [[그리스군]]만이 아나톨리아 [[내륙지역|내륙]]까지 진격하여 독립군을 위협했다. 개전 초기에만 해도 그리스군이 승기를 잡고 독립군의 본진인 앙카라까지 위협했으나, 무스타파 케말이 격퇴하는데 성공하여 전세를 [[역전]]시켰고 [[1922년]]에 이르러서는 [[이즈미르]] 등 [[그리스 왕국|그리스]]가 세브르 조약을 통해 [[할양]]받은 서부 아나톨리아 영토까지 독립군이 수복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코스탄티니예에 주둔하며 관망하고 있던 [[영국]]이 독립군과 그리스 양측에 재협상을 제안했는데, 독립군 은 [[영국군]]까지 몰아내고 코스탄티니예를 수복하기엔 자신들의 역량이 모자라다는 것을 인식했기에 재협상을 수용했고, 그리스는 더이상의 영토 상실을 막기 위해서라도 재협상에 응했다. [[스위스]] [[로잔]]에서 재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영국군이 코스탄티니예에서 철수하여 독립군이 코스탄티니예에 입성했는데, 무스타파 케말은 협상국에 [[부역]]한 파디샤 메흐메트 6세를 [[폐위]]시킴으로써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1923년]]에는 [[로잔 조약]]이 체결되어 독립전쟁이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는데, 이를 통해 아나톨리아와 [[트라키아|동트라키아]] 수복을 인정받을 수 있었으나, [[에게해|에게해 제도]]의 대부분과 [[메소포타미아 위임통치령|이라크]], [[시리아-레바논|레]][[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반]][[트란스요르단|트]] 등은 [[협상국]]들이 지배하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는데, 해당 지역들은 [[튀르크|튀르크계]] [[주민]]들이 적어서 [[본토]]보다 수복할 [[명분]]이 약한데다, [[군사력]]으로 수복하기에도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