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르키예/역사 (문단 편집) === [[튀르키예 공화국]] === [[1923년]] [[로잔 조약]] 이후 [[튀르키예 공화국]]이 정식으로 [[건국]]되었고, [[무스타파 케말]]이 초대 [[튀르키예 대통령|대통령]]에, [[이스메트 이뇌뉘]]가 초대 [[총리]]에 취임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공화정]] 수립 초기에는 [[메흐메트 6세]]의 후계자였던 [[압뒬메지트 2세]]를 [[칼리파]]로 옹립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제정]] 폐지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세계 전체의 [[교주(종교)|수장]]이라는 종교적 권위가 있는 칼리파는 [[비주권군주제|명목상으로나마 존속시켰으나]], [[1924년]]에 완전히 폐지하여 압뒬메지트 2세를 추방하고 [[튀르키예]] 내 이슬람 교단을 관리할 권한을 튀르키예 종무부로 이관했다. 그리고 무스타파 케말은 [[튀르키예어]]에 [[로마자]]를 도입하고 [[라이시테|강력한 세속주의 정책]]을 펼치는 등 [[현대]] 튀르키예 공화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고 덕분에 [[국부]]에 해당하는 [[아타튀르크]]라는 [[성씨]]까지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공화인민당]]이라는 [[일당제|유일 합법정당]]만을 인정하고 철권 독재를 펼쳤다는 양면성이 있는 인물이었다. 아타튀르크는 1938년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11월 12일 오전 9시 5분에 서거했다. 그 시간에 튀르키예 전역에서 사이렌이 울리고 모두가 하던일을 멈추고 아타튀르크를 추모했다. 아타튀르크 서거 이후, 튀르키예 대국민 회의는 회의를 통해 [[이스메트 이뇌뉘]]를 제2대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이뇌뉘는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 정책을 이어나가 강력한 세속주의를 펼쳤다. 아잔의 튀르키예어 암송 의무화 등을 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로 연합국의 민주화 요구 및 국내의 반발로 이뇌뉘는 1950년에 자유 민주 선거를 펼치고 튀르키예 최초로 이슬람계 정당인 민주당이 집권한다.[* 그 이유는 소련이 농촌지역을 이용하고 튀르키예도 위성국으로 만들려 하자 소련이 선수치기 전에 일당독재를 포기했던 것이고 그 결과 6.25전쟁 때 참전하고 끝내 NATO에 가입할 수 있었다. 만일 끝까지 고집했다면 공산국가에 의해 남베트남보다 먼저 튀르키예가 적화되었을 것이다.] 민주당 소속으로 집권한 총리 [[아드난 멘데레스]]는 힘이 센 군부를 억제하려고 했지만 군부는 1960년에 쿠데타로 아드난 멘데레스를 몰아냈다. 1961년 총선으로 이뇌뉘는 다시 재집권하였다. 이후 1965년에는 쉴레이만 데미렐의 정의당이 승리 하였지만 근로자의 파업등 좌 우익 갈등으로 혼란이 가속되자 군부는 경고장을 날린다. 튀르키예 군부는 술레이만 데미렐에게 내각을 사퇴하고 아타튀르크의 이념을 계승하라고 경고장을 날린다. 경고를 받은 쉴레이만 대통령은 회의를 소집하고 사퇴하였다. 1971년 신정부가 구성 되었지만 여전한 좌우익 갈등과 갈등이 중단되지 않자 군부는 1971년 4월 28일 앙카라와 [[이스탄불]]을 비롯한 대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군부는 강력한 권위주의 케말리즘을 실행시켰다. 1971년 이후에는 연립의 연속이였다. 공화인민당 뷜렌트 에제비트의 연립내각 등의 연립정권으로 정부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웠다. 1980년에는 간선제로 뽑아야 할 대통령을 선출하지 못했다. 이러한 위기에 [[케난 에브렌]]을 중심으로 한 군부는 행동에 나서 계엄을 선포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기성정치인 정치활동 금지와 정당 해산등이 이루어졌고 명분은 아타튀르크 주의의 실천과 이슬람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숙청이였다. 케난 에브렌의 국가안전위원회(MGK)는 1983년 까지 튀르키예를 이끌었다. 군사정부는 1983년에 총선을 실시하였고 투르구트 외잘이 이끄는 조국당이 53%로 당선되었다. 조국당은 자유경제를 펼쳤지만 인플레를 잡지 못했다. 인플레를 잡지 못해 조국당은 1991년에 정권을 내주었다. 1991년 이후에는 정도당과 사회민주당이 연립정권을 구성하였다. 그 결과로 탄수 칠레르가 튀르키예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경제의 혼란으로 터키 역사 최초로 이슬람주의에 기반한 복지당이 제1당이 되었다. 그러나 21%의 지지율이였기 때문에 복지당은 다수당들의 눈치를 봐야했으며 1997년 군부는 이슬람주의를 경고하며 쿠데타를 일으키겠다고 경고하였다. 복지당 당수였던 네지메틴 에르바칸은 사퇴하였고 복지당은 금지되었다. 이후 정의개발당 집권 전까지는 연정이 계속되었다. 2000년에는 튀르키예 헌법재판소장 출신이던 아흐메트 네지데트 세제르를 튀르키예의 10번째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2003년에는 복지당의 후신인 정의개발당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을 총리로 집권하였다. 2007년 이전까지는 세속주의 대통령과 이슬람주의 총리의 공존이 지속되었고 2007년에는 야당과 군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의개발당의 [[압둘라 귈]]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압둘라 귈의 후임으로 당선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에르도안]]은 이슬람적 정책과 신자유주의 경제 자유 정책으로 큰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세속주의의 약화와 우익화로 세속주의 세력의 염려를 받고 있다. 2013년에는 국가에 대한 맹세를 폐지하고 히잡착용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였다. 51%의 찬성으로 동부와 중부에서 크게 찬성하였다. 이후에는 튀르키예의 백악궁을 짓고 총리관저와 대통령관저를 맞바꾸었다. 2010년 튀르키예 헌법 개정으로 3선 제한이 폐지되며 에르도안은 2019년에 또 대선에 나갈 수 있다. 2016년 7월 15일에는 튀르키예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그간 억눌리던 군부가 에르도안에게 저항을 시도했으나 그동안 튀르키예 군부에 대한 증오가 가득했던 튀르키예 시민들과 정치권의 분위기에 힘입어 에르도안 정부는 쿠데타를 진압하였다. 튀르키예 평화 회의라는 군의 소조직이 쿠데타를 시도했으며 귈렌의 봉사운동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쿠데타 시도 이후에는 귈레니즘 세력이 크게 숙청되고 있고 서방과의 관계는 악화되고 있다. 하지만 군부는 제압당했다 해도 튀르키예에서 군부의 지위가 워낙 강하다보니 군부는 기회만 있으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할것이니 튀르키예의 정치는 굉장히 불안하다. 특히 억눌려살던 쿠르드인들도 폭발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IS같은 이슬람 무장단체들이 게릴라전과 테러를 일삼아대어 튀르키예는 내전과 테러로 갈수록 불안해지고 있다. 게다가 테러와 정치불안으로 인한 경제난까지 시작되어 튀르키예인의 삶도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중동의 재앙인 [[사막화]]로 인해 튀르키예도 수자원이 갈수록 고갈되는 판국이다. 참고로 1990년대 중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교과서 세계사에선 아타튀르크가 아니라 [[케말 파샤]](케말 장군)라는 이름으로 건국자로 소개하였고, [[2000년대]] 초반, 어느 여행 책자에선 튀르키예를 가리켜 아타, 튀르크, 케말이라는 3국이 통일된 것이라는 주장을 피며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것도 [[대한항공]] 기내지'''였는데 당연히 튀르키예인들의 비난을 받고서야 수정했다. 하여간 오스만 제국의 해체로 인해 튀르키예와 이슬람권이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잃고 만다. 그러다보니 튀르키예인들은 이에 대한 열등감이 심해져 반서방 감정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지금도 튀르키예는 서방에 대한 감정이 나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1차대전에서 독일과 손잡았다가 변변치 않은 결과를 초래했던 경험을 살려 [[중립국]]으로 지내다가 [[소련]]의 압력으로 [[1945년]] 독일에 형식적인 선전포고를 했다. 그 전에 나치가 1차대전 당시 동맹국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튀르키예로 나치 고위간부들이 방문하면서까지 튀르키예 정부에 참전을 권유했으나 끝끝내 거부했다. 이 덕분에 이스메트 이뇌뉘 당시 튀르키예 대통령의 이런 중립행보는 나중에 훌륭한 업적이라는 찬사까지 듣었다. 나치와 손잡고 싸웠더라면 튀르키예 역사는 아주 비극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미국이 주축인 연합군한테 개박살날 것이 분명하고 1차 대전과 달리 나라가 진짜로 분할될 수 있는 데다 공산화에 내전까지 일어났을 지도 모른다. 또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 학살]], [[쿠르드족]] 학살, [[아시리아 동방교회]] 신자 학살 등으로 국제여론에게 비판을 받은 경험이 있다. 세계 최초로 다국적군에 의한 치안유지가 실시되는 등 국제정치에 있어서 많은 선구자적 면모를 가진 국가이다. 60년대부터 엠네스티 보고서를 통해서 튀르키예는 인권탄압국으로 자주 이름이 올랐고 [[박종철 사건]]때 고문에 대한 고발 르포를 취재하면서 [[튀르키예]]의 고문 실태에 대해서 신동아 잡지에서 고발한 게 있었다. 우습게도 이를 다루던 영화로 70년대에 작품성을 인정받았었던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최근에는 제작진과 원작자도 사죄하는 튀르키예 왜곡 차별영화가 되었다. 차라리 이 시절 터키의 적나라한 인권탄압을 참고하자면 튀르키예에서 만든 스위스 영화(욜 항목 참고)[[욜]]을 보면 꽤 느낌이 올 것이다. 이 당시 튀르키예의 인권탄압이라면 [[쿠르드인]]들에 대한 탄압도 유명한데, 현재 1500만명(추정)에 육박하는 쿠르드계 인구에 대해 튀르키예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90년대까지 '그딴 거 없다. 얘네들은 그냥 산지에 사는 튀르키예인들일 뿐이야'였다. 쿠르드 문화에 대한 박해는 2000년대 이슬람주의 정권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쿠르드어 사용 자체가 법적으로 금지되는등, 굉장한 무리수를 많이 두었었다. 하지만 이슬람주의 정권 수립후 쿠르드 문화에 대한 규제가 많이 풀려서 오늘날에는 이 앙금이 점점 풀리는 과정이기는 하다. 그러나 에르도안 대통령의 독재로 튀르키예의 인권은 과거처럼 심하게 탄압받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급속도로 성장해 각광을 받는 나라이다. 탈이슬람으로 튀르키예를 현대화 시키려했던 아타튀르크의 바람과는 달리, [[이슬람주의]]당인 정의개발당(Adalet ve Kalkınma Partisi)과 그 당수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ğan)의 지도하에 있다. 그러나 에르도안 체제는 튀르키예 정치계의 양날의 검이었던 군부 내 쿠데타 세력을 박살낸 이후 점점 이슬람주의 독재 체제로 나아가고 있고, [[2013 터키 시위|때문에 2013년부터 적잖은 저항을 받고 있다.]] 미래가 어쨌든 일단 에르도안의 지도하에 잠재되어 있던 포텐셜을 살려 상당한 경제/군사대국, [[지역강국]],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의 롤모델로 성장한 튀르키예는 [[G20]]의 회원국으로 포함되었다. 예전까지는 [[유럽 연합]] 가입을 시도했지만, 이제는 좀 자랐다고 미련이 없는 듯. EU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유럽연합 회원국과 무관세 무역을 하고 있고 단물은 이미 다 빨아먹고있는 터에 완전가입까지 해야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현 정부의 이슬람성향 때문에 EU에 발담그기를 회피한다는 분석도 있다. EU의 주요국 국민들도 종교적 차이와 경제적 문제 때문에 약간 꺼리는 분위기이고.[* 무엇보다 경제위기로 인해 영국이 떠나고(브렉시트) 중동 위기로 난민이 대거 유입된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악재가 겹치며 EU 내부 갈등도 심하다. 극우파 정당들의 정치력이 강해지며 주요국 정권이 교체되기도 했다.] 2022년 6월 1일 대외적 국명을 자국 발음인 튀르키예로 변경했다. [각주] [[분류:튀르키예의 역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