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라야누스 (문단 편집) ==== 파르티아 전쟁과 사망 ==== 어느 정도 행정적 정비와 개혁이 이루어지자, 트라야누스는 자신의 장기인 군사 원정을 다시 계획하고 [[114년]]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였다.([[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로마는 [[네로]] 황제 이후로 아르메니아의 왕위에 파르티아의 뜻에 맞는 인사를 앉히고 이를 로마가 승인하는 형태로 양보해서 파르티아와의 관계를 봉합하고 있었다. 헌데 파르티아의 새로운 왕중왕에 등극한 [[오스로에스 1세]]는 서기 [[110년]] 이 협정을 어기고 일방적으로 아르메니아 왕을 페위하고 [[파르타마시리스]]를 새 왕으로 앉힌다. 이는 로마의 동의를 받지 않은 협정 파기였고, 트라야누스는 로마에 우호적인 아르메니아 왕이 폐위되자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서기 [[113년]] 가을 동방을 향해 출격했다. 전쟁 배경에 관해, 현대사가 개리 K. 영과 같은 이들은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전쟁을 통해 무역로 확보와 직접 세수 확보 목적으로 전쟁을 벌였다고 분석한다. 허나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같이 통관세가 붙지도 않고, 두 국가 모두 사치품 교역망 확보에 열을 올리며 경쟁하는 앙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파르티아는 로마와 중국, 인도와의 무역을 중개만 하면서 이를 방해하지 않았고, 중간에서 폭리를 취하기 보단 자국 상인들에게 오롯이 맡긴 국가였다. 따라서 로마사 학자들은 천상 군인인 그가 오로지 로마군인들이 갖고 있는 군사적 영예와 정복에 대한 강한 열망 때문에 이 전쟁을 계획했고 여러 우려에도 이를 밀어 붙였다고 설명한다. 이는 당대의 원로원 의원이자 비티니아 총독이었던 소 플리니우스의 서한들, 후대의 디오 카시우스가 원로원 관보와 여러 기록을 토대로 기술한 저술에서 확인된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트라야누스는 원로원 연설과 파르티아 전쟁 과정에서 파르티아 원정이 영토 확장과 군사적 위엄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이 시대의 원로원 관보 등을 통해 기술한 1세기 뒤의 디오 카시우스의 증언처럼 황제는 원정을 통해 얻을 군사적 영예에 집착했고 이 원정으로 어떤 로마인보다 압도적인 군공을 세우고 싶어했다. 트라야누스의 동방 출정은 117년까지 계속됐는데, 전쟁 준비는 다키아 원정이 시작되기 전부터 차근차근 진행됐다. 그래서 실제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소모된 비용은 상당히 컸고, 이 비용의 대부분은 동방의 여러 속주, 지방정부들에게 고스란히 청구돼 상상 이상으로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이 동원됐다. 이는 소 플리니우스가 비티니아에 있는 동안 쓴 111년 서신들에서 확인된다. 소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가 즉위 직후부터 이 전쟁을 신중하고 꼼꼼히 계획했음을 직간접적으로 묘사했는데, 여기에는 황제의 지시로 어떤 물자가 동원되고 총독이 인적, 물적 자원을 비축하면서도 각 속주의 지방의회와 유력자들에게 이에 대한 분담까지 주문한 것이 확인된다. 따라서 트라야누스가 동방 원정을 시작했을 때, 10개 군단이 동부 전선으로 집결했고 모든 군대의 보급물자는 로마 제국의 동부 속주들이 분담했다. 여기에는 식량, 무기 외에도 각 속주마다 차출되는 보조병 등도 포함돼 실제 비용은 부유한 동부 일대 주민들도 부담을 가질 만큼 꽤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 명분이 파르티아 측의 협정 파기와 파르타마시리스의 즉위인 만큼, 로마군은 트라야누스 지휘 아래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파르타마시리스를 폐위시키고 아르메니아를 병합시킨다. 이어 황제의 지휘 아래 로마군은 코카서스 일대와 흑해 동부 연안까지 모조리 로마 속주로 병합시킨다. 같은 시간, 트라야누스의 명령에 따라 [[루시우스 퀴에투스]]를 필두로 한 야전 사령관들이 로마군을 이끌고 파르티아를 일제히 공격했다. 이 결과, 트라야누스 황제는 개전 2년 만에 로마 영토를 티그리스 강 유역과 유프라테스 강 상류, 페르시아만까지 넓혔다. 이 과정에서 트라야누스는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합병하고,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점령했다. 크테시폰의 점령 이후 그는 [[페르시아 만]]에 당도하게 되는데, 이로써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유럽 대륙의 군주로서 정복 활동을 통해 가장 동쪽 먼 곳에 도달한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페트라|나바테아 왕국]][* [[아랍인]]의 직계조상인 나바테아 인들이 요르단에 세운 왕국이다.]을 굴복시켜 아라비아의 속주로 편입시켰다. 이 기간 동안 고도 [[바빌론]]을 [[성지순례]]하기도 하고, 본인이 젊었더라면 알렉산더처럼 인도까지 갔을 것이라고 야망을 표하는 등 모든 게 다 잘 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눈부신 군사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다키아 원정 때의 초토화된 다키아 사회를 생각한 [[파르티아]] 군소 영주들의 게릴라 활동과 보급선의 장기화, 보급기지였던 [[115년 안타키아 지진|안티오키아의 지진]] 등으로 말미암아 파르티아 전쟁은 점차 소득은 없고 비용만 많아지는 형태로 바뀌게 된다. 이는 오촌조카 하드리아누스와 같은 일부 엘리트들이 경고한 부분이었는데, 설상가상 제국 전역의 반란으로 확산됐다. 파르티아는 곧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했고, 아르메니아 역시 로마에게 대항했다. 다뉴브 강 일대에서는 사르마티아인, 록솔라니인들이 꿈틀거렸고, 브리타니아에서는 잠잠하던 칼레도니아 쪽에서 불순한 움직임이 돌고 로마 수비대가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접경 지대에서 철수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반란, 소란이 연이어 터지자 셀레우키아,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까지 정신없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런 와중에 오늘날 '''[[제2차 유대-로마 전쟁|키토스 전쟁]]'''이라고 부르는 유대 지역의 반란까지 터졌다. 파르티아로 출정을 나가 있던 로마군의 후방인 키레나이카와 이집트 및 키프로스 섬과 유대 지역에서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수십만 명의 로마 민간인들과 후방에 남겨진 소규모의 로마군 수비대를 대량 학살했다. 특히 로마군에게 식량을 공급하던 대곡창지대인 이집트에서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로마군의 식량 보급이 위태로워졌다. 이 때문에 결국 트라야누스 황제는 파르티아 원정을 도중에 포기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니 트라야누스는 단호하고 신속하게 대응하면서 위기를 넘기려고 해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다행히 [[유다이아 속주|유다이아]] 총독을 맡고 있던 [[베르베르]] 출신의 뛰어난 야전사령관 루시우스 퀴에투스(Lusius Quietus)가 [[키레나이카]], [[키프로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의 유대인 이주민들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을 진압하고, 리다를 함락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직후 트라야누스가 죽고 제위를 차지한 [[하드리아누스]]에게 최대의 경쟁자로 찍혀 처형당하고 만다.] 만약 이때 유대인들의 반란이 없어서 로마군의 후방과 식량 보급이 안정되었다면, 아마 트라야누스 황제는 계속 파르티아를 밀어붙였을 것이고 어쩌면 파르티아가 완전히 멸망했을 수도 있었기에, 로마인들로서는 여러모로 아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옆의 링크를 참조 바람.[[http://blog.daum.net/timur122556/6198|#]] 따라서 116년 트라야누스와 로마는 동방 원정을 통해 파르티아에게서 빼앗은 영토를 재정복하지 못하고,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명목상 자신들의 클리엔테스인 파르티아 왕자에게 넘기는 선에서 사실상 전쟁을 끝마치게 된다. 이때 트라야누스는 아시리아 속주 전체와 대(大) 아르메니아로 불린 지역의 일부를 상실했는데, 그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는 안티오키아로 돌아간 뒤, 부족한 인적, 물적 자원을 한계치까지 징집해 메소포타미아 재탈환을 준비케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로마 수뇌부들은 우려를 재차 표했고, 하트라 공성전까지 실패하고 본인은 [[열사병]]으로 건강이 안 좋아지는 결과까지 얻게 됐다. 이렇게 되니, 트라야누스는 점차 파르티아 전쟁에 대한 실망감이 커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로마군 내부 분위기 역시 가라앉게 됐다. 설상가상 서방과 달리 일교차가 심한 사막 기후에서 3년간 힘겨운 원정을 하면서, 황제의 건강은 악화된 터라 체시폰에서 돌아오던 중 강철 같은 건강마저 잃고 만다. 하여 트라야누스는 안티오키아에서 겨울을 지낸 뒤, 이듬해 봄에 정복했다가 빼앗긴 메소포타미아를 다시 한번 차지할 원정 계획을 미처 실행하지도 못하고 로마로의 귀환을 결정했다. 이때 트라야누스는 자신의 유일한 남자 친족이자, 누나의 손녀 사위인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를 동방 사령관으로 임명한 뒤, 육로를 통해 킬리키아로 향했다. 하지만 귀환 도중, 트라야누스는 [[중풍]] 증세를 호소하다가 쓰러졌다. 오랜 긴장감과 원정 실패에 대한 자책, 아쉬움으로 힘겨워했던 몇 달간의 모습 때문에 이렇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쓰러진 황제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며칠 뒤인 117년 8월 9일 킬리키아의 작은 섬 셀레누스에서 사망했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64세였다. 사후 장례가 치루어졌으며 관례에 따라 신격화되었다. 죽기 직전에 그는 5촌 조카이자 시리아 속주 총독이었던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지명하여 후임 황제가 되게끔 했는데, 이를 두고 하드리아누스 재위 초반에 논란이 있었다. 트라야누스가 명시적으로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지명한 적이 없었으며, 양자 지명 자체가 트라야누스 사망 당시 플로티나 황후가 황제의 어명이라면서 대신 전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트라야누스가 사망한지 3일 후 트라야누스의 음료 담당 시종이 의문사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하드리아누스 항목 참조. 로마 역대 황제 중 가장 뛰어난 군사적 업적을 세운 트라야누스는, 사후 로마인들에게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운 다키아, 파르티아 원정 계획을 현실에 옮겨 영웅 같은 정복과 승리를 가져다준 황제로 기억됐다. 하지만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전쟁은 실패로 끝났고, 다키아 전쟁 승리 이후의 대처 역시 미완인 터라 이는 고스란히 후임 하드리아누스에게 넘어갔다. 다행히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가 벌인 전쟁으로 발생한 제국 군사비용과 인적, 물적 소비 관리 측면에 역량을 집중했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에도 트라야누스의 전쟁들은 결과론적으로 3개의 완충국[* 가까운 게르만족, 파르티아, 나바티아 아라비아]을 없애거나 크게 약화시켜, 끝내 후임 황제들에게 재앙으로 찾아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