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라야누스 (문단 편집) ==== [[다키아 전쟁]] ==== 즉위 직후 그가 가장 우선시한 것은 [[도미티아누스]]가 중단한 [[다키아]] 원정이었다. 그가 다키아 원정에 주력한 이유는 첫째, [[도미티아누스]] 암살의 간접적 원인이 다키아 원정 실패에 있었다는 점. 둘째, 로마 제국의 중요한 북방 경계선인 도나우 강 하류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서기 99년에 로마로 돌아간 트라야누스는 서기 101년 [[다키아 전쟁]]을 시작했다. 다키아 지역 주민들의 주무기인 [[팔크스]], [[http://ko.weapon.wikidok.net/wp-d/57b29c8e846cc39e37859824/View|롬파이아]]와 투척 도끼 때문에 제법 피해를 본 로마군은 정강이 받이와 검을 드는 오른팔을 보호하는 찰갑, 안면 가리개를 도입하는 식의 중무장화를 통해 다키아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2차례의 원정[* 1차: 101~102, 2차: 105~106]에서 트라야누스는 다키아를 완전히 정복했으며, 새로 다키아 속주를 창설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유언한 제국 확장 정책의 금지 원칙을 어긴 첫 번째이자 마지막 사례가 되었다. 또한 다키아 원정 과정에서 이전의 로마 정책과는 달리 피정복민들에 대한 잔인하고 단호한 말살 정책을 펴 다키아 지역을 초토화시켜버렸다.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는 사력을 다해 항전했으나 끝내 패망을 면치 못하고 잡힐 위기에 몰리자 자살했다. 다키아 원정 이후 줄어든 군비, 다키아의 풍부한 금, 은광으로 인한 예산의 증가, 그리고 다키아로부터 철저히 약탈해온 풍부한 전리품 등으로 인해 엄청난 추가예산이 확보되자[* 이 시기 트라야누스를 가리켜 로마 제국 역사상 어느 황제보다도 풍부한 자금을 확보했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이집트라는 부유한 지역을 새로 합병한 [[아우구스투스]]를 제외하곤 대적이 불가능한 수준이었고,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에서 약탈해온 자금을 보유한 [[하드리아누스]] 황제 또한 풍부한 자금을 보유했다.] 트라야누스는 속주들과 이탈리아, 로마 등지에서 대규모의 토목 공사를 실시하고 장려했다. 도로·교량·수로의 건설, 황무지 개간, 항구 건물의 건축이 이루어졌고, 오늘날 스페인, 북아프리카, 발칸 반도, 이탈리아 등지에 유적이 남아 있다. 특히 로마는 트라야누스의 토목공사로 풍요롭게 변모했다. 이때의 트라야누스의 건축 목록 중 예로 들 수 있는 건 [[포로 로마노]]의 트라야누스 포룸[* 현대에는 정중앙의 트라야누스 원기둥을 제외하고 유적이 많이 파괴된 상태다. 무솔리니가 한 짓이 원인이다.], 도나우 강 중류에 있는 트라야누스 다리[* 이 다리는 당시 로마의 기술력을 상징하는 웅장한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8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이 도나우 강에 기선이 다닐 수 있도록 '''폭파했다.'''] 정도를 들 수 있다. [[파일:257px-Trajan's_Column_HD.jpg]] 트라야누스 기둥의 모습.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